헤드라인▽
항일의병장 등 259명 학살문건 찾았다
하동문화원, 정재상 씨 공개 ‘목 잘리고 칼에 찔려 순국’…41명 서훈 신청
작성 : 2014년 02월 25일(화) 11:02 가+가-
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경남 하동지역 향토사학자가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명의 문건을 찾아 신원이 확인된 의병장 41명을 정부에 서훈 신청하고 명단을 공개했다.

이번에 문건을 찾아 서훈을 신청한 향토사학자는 정재상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

정 위원장이 찾은 문건은 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1909년 국내에서 50 ~ 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 숱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 때 체포돼 총살당하거나 목이 잘리고 칼에 찔려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활동 내용이 담겼다.

정 위원장은 “이번 자료는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 소장)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 ‘조선 폭도토벌지’ 등에서 미 서훈 항일의병장 41명(경남 12명·경북 14명·전남 8명·전북 5명·강원 2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학살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이 찾은 문건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하동출신 정승유(鄭勝有) 의병장의 체포·탈옥·총살과정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칼로 도륙당한 합천출신 신상호(申相鎬) 의병장, 의령의 문봉래(文奉來) 의병장, 강원도 삼척 육백산을 중심으로 대활약을 펼친 김수영(金壽榮) 의병장, 경북 경주의 권문선(權文善) 의병장이 확인됐다.

또 체포된 후 일본군 숙사에서 머리가 박살나 처참하게 순국한 전남 곡성의 손학곤(孫學坤) 의병장, 경남 함양에서 마을이장으로 활동하며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총살당한 김찬언(金贊彦) 의병장, 일본군에 체포된 후 칼에 찔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전북 장수의 박재근(朴在根) 의병장, 목이 잘려 순국한 진안출신 김진명(金辰明) 의병장이 포함됐다.

한말 한병(군인) 출신으로 의병대의 훈련교관을 지내다 체포돼 총살당한 하동출신 이덕길(李德吉) 의병장 등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41명의 의병장과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50명이 학살당한 문건이 이번에 처음 알려졌다.

정 위원장은 “이번 문건에 드러난 의병장의 학살은 ‘도주를 기도함에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했다”며 “항일의병장을 죽이는 명분이 모두 도주라는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쓰며 항일투사들의 학살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또 “체포된 항일의병장을 고문한 후 마지막에는 목을 자르고, 머리를 박살내 죽이고, 칼로 잔혹하게 찔러 죽여 놓고 그들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고 밝히고 있어 정말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덧붙였다.

정 위원장은 “이번에 찾은 41명의 의병장에 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서훈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미 서훈자로 밝혀졌다”며 “이번 문건은 의병장들의 뚜렷한 항일기록이 있는 만큼 독립유공자 서훈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순국한 항일의병장 41명 서훈신청자 공적요지

◇ 강원 2명
김수영(金壽榮 ∼1907. 12. 19·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도 육백산(六百山)·탕실(湯實)·석개(石開)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17일 강원도 삼척 도계 육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12월 19일 총살됐다.

김성산(金成山 ∼1907. 11. 18·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강원도 삼척군 장성면 황지(黃池)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1월 18일 소백산맥에 있는 강원도 황지 및 경북 봉화군 고직령(古直嶺) 부근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의병 50여명이 일본군의 칼에 찔려 한꺼번에 전사하고 그는 체포돼 격살(擊殺)됐다.

◇ 경남 12명
정승유(鄭勝有 ∼1908. 12. 15·경남 하동군 진교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박매지 등과 함께 하동·산청·진주 등지에서 의병 300여명을 규합,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정승유는 1908년 7월 중순 하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하동경찰서 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그는 먼저 수감돼 있던 박인환(박매지)·권석도 등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그는 이후 계속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해 12월 15일 하동진교에서 다시 체포돼 압송되던 중 하동군 양보면 봉곡촌(鳳谷村)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총살됐다.

신상호(申相鎬·36세, 1872~1908. 8. 31·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산 일대와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합천군 삼가 평구(平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휘하 의병 4명과 함께 체포됐다. 이후 일본군은 신상호 의병장만 칼로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

김홍대(金弘大 ~1907. 10. 28·일명 김창석·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함양·산청·남원·무주·장수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12일과 13일 함양남방 약 50리 지점인 마천면 추성(楸城)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으나 의병 10명이 전사했다. 이후 김홍대는 10월 28일 오전 6시 함양군 북방 약 150리 부근 대곡동(大谷洞)에서 체포돼 총살됐다.

백운하(白雲下 ~1908. 8. 21·경남 밀양 무안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밀양과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1일 밀양군 무안동(密陽郡 武安洞) 부근에서 의병 6명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됐다. 이날 백운하 의병장을 비롯한 7명이 총살됐다.

이두익(李斗益 ~1908. 5. 20·경남 삼가군 모고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합천·삼가·거창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는 특히 손태주(孫太朱·마산), 이준명(李俊明·성주), 영기선(榮基善·영산) 등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년 4월 8일 합천 우체국을 공격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삼가군 모고면(毛古面)에서 체포돼 총살됐다.

이안옥(李安玉 ~1908. 8. 31·경남 함양군 휴천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함양·산청·진주 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 8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함양군 동남쪽 15리 목동(木洞) 부근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체포돼 산청군 서방 약 40리 오봉산(五峯山)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동지 2명은 9월 2일 함양군 추성(楸城) 남방 40리에서 총살당했다.

김순오(金順吾 ~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함양군과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수십명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 15일 김찬언(金贊彦) 등과 함께 함양군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총살됐다.

김찬언(金贊彦 ~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 일대인 함양군 마천면 창촌(倉村)에서 마을 동장(洞長)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 15일 같은 마을 김순오(金順吾)와 함께 격문을 돌리다 체포돼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김진규(金振奎 ~1908. 4. 25·경남 거창군 가북면 심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거창에서 유종환(兪宗煥)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며 거창인동·신방·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5일 유종환, 김진규 등 의병 24명이 거창군 인동(거창 동북 약30리)에서 숙영했다.

이후 이들은 거창 동북방 약45리 심방(尋芳)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김진규를 비롯한 의병 9명이 전사하고 유종환 등 4명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문봉래(文奉來 ~1908. 6. 7·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의령·창녕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 6일 의령북방 약30리 부근 갑을동(甲乙洞)에서 문봉래가 지휘하는 의병 50명이 주둔했다. 이후 문봉래 의진은 6월 7일 갑을동 부근 양성동(陽成洞) 학교에서 숙영 중 새벽 2시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문봉래를 비롯한 의병 12명이 전사했다.

성만석(成萬石 ~1908. 8. 3·경남 합천군 삼가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황매산일대인 삼가군·합천군 등지에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일 삼가군 서북 35리 부근인 목동(木洞) 서남 5리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성만석을 비롯해 5명이 전사했다.

이덕길(李德吉 ~1909. 3. 21·경남 하동군 악양면) 의병장은 한말 한병 상등병(군인) 출신으로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하동·산청·함양·진주·구례·곡성· 광양 등지에서 이학로, 박매지, 황낙현, 노성화, 최경순, 우수보, 권석도, 전재수, 심상근, 이춘이, 김채홍, 송명운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는 특히 의병대의 훈련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14일 산청군 백곡면(栢谷面) 신대리(新垈里)에서 일본군 매계(梅溪)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됐다. 이후 그는 3월 21일 총살됐다.

◇ 경북 14명
권문선(權文善 ~1908. 5. 28 ·경북 경주군 산내면 감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북 경주군 일대에서 의병 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28일 경주군 감존(甘存)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체포돼 총살됐다.

김성달(金聖達·27세, 1880~1907. 9·경북 문경군 신동면 노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일원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된 후 발각돼 총살됐다.

김용출(金用出·25세, 1882~1907. 9·경북 화안군 달미면 광동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경북 일원에서 60여명의 의군을 조직해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 체포돼 총살됐다.

김직현(金直玄·32세, 1875~1907. 12. 14·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주출신의 이모(李某) 의병장과 함께 1907년 초부터 영천·청송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14일 영천군 신촌면 하란동(新村面 下蘭洞) 부근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 후 순국했다.

박인시(朴仁是 ~1908. 8. 26·경북 고령군 명곡)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고령과 경남 거창 일대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6일 의병 20여명과 함께 경북 고령군 서북방 약35리 지점인 명곡(明谷)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휘하의병 15명이 전사했다. 이날 박인시 의병장은 체포돼 총살됐다.

이로침(李魯浸 ~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李先達), 이병기(李炳基)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 15리) 남방에서 이병기와 함께 체포되어 총살됐다.

이병기(李炳基 ~1908. 10. 27·경북 구미시 백산면 인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구미에서 이선달(李先達), 이로침(李魯浸) 등과 함께 의병 9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10월 27일 백산(栢山·인동 서방 약15리) 남방에서 이로침과 함께 체포돼 총살됐다.

김백룡(金白龍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입석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황방우(黃方右), 최무용(崔武用), 정파총(鄭把惣) 등 100여명의 의병과 함께 경북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10일 김천(金泉)수비대에 의해 황방우와 함께 체포돼 성주군(星州郡)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황방우(黃方右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연명면 수오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김백룡(金白龍) 등 100여명과 함께 경북 일원인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星州郡)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김백룡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성(旺星)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최무용(崔武用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정파총(鄭把惣)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북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정파총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리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정파총(鄭把惣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신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최일진(崔一進), 최무용(崔武用) 형제 등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북 개녕과 성주·김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최무용과 함께 체포돼 성주군 왕리(旺里)에서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최일진(崔一進 ~1908. 12. 10·경북 개녕군(김천시) 농소면 봉현동) 의병장은 1907년부터 동생 최무용, 정파총 등과 함께 경북 개녕군(지금의 김천시)과 성주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10일 김천수비대에 의해 체포돼 12월 11일 김천에서 총살됐다.

박부장(朴部將 ~1908. 4. 3·경북 성주 거구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경북 성주 등지에서 박봉래(朴鳳來) 의병장 등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 3일 박부장은 지례(知禮 지금의 금릉金陵) 남방 약30리 지점인 평촌(平村)·지소(평촌 동방 약5리)·거구리(巨句里)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과 활동하고 있던 중 4월 3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하다 최지(崔地)등 13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김성칠(金成七 ~1907. 12. 19·경북 봉화군 황엽령)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북 봉화군 일대에서 채모(蔡某) 의병장과 함께 의병 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9일 일본군 수비대와 황엽령(黃葉領) 백산 서방에서 교전을 벌이다 채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 31명이 전사하고 김성칠은 체포돼 총살됐다.

◇ 전남 8명
손학곤(孫學坤 ~1908. 4. 29·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지역인 곡성·구례·광양·하동·남원을 중심으로 소광선(蘇光先) 의병장과 함께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8일 무렵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남 곡성군 동계리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는 4월 29일 일본군 숙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머리가 박살나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정섭(李丁燮 ~1908. 11. 7·전남 함평군 식지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그의 부친 이남규(李南奎)와 함께 기삼연 의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7일 그의 부친 이남규(기삼연의 후군장)와 전주 남문밖에 살고 있던 이내구(李內逑)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돼 3명 모두 총살됐다.

김권석(金權石 ~1908. 7. 7·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범계리 천평)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곡성·남원·하동 등지에서 의병 2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 7일 전남 구례(지금의 곡성군) 천평(川坪·구례 서남방 약 50리)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김권석을 비롯한 4명이 전사했다.

김학삼(金學三 ~1908. 6. 14·전남 구례군 구례읍 독자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전남 구례에서 신모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약하며 일제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 14일 김학삼은 의병 30명과 함께 구례군 독자동(讀子洞)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김학삼을 비롯한 9명이 전사했다.

최상광(崔相光 ~1908. 6. 14·전남 구례군 마산면 상사리 )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구례·곡성·광양·하동·남원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최상광은 1908년 6월 14일 전남 구례군 상사리(上沙里·구례 동북방 약 10리)에서 의병 2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최상광을 비롯한 6명이 전사했다.

김례중(金禮中 ~1908. 4. 7·전남 나주 월명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김례중은 1908년 4월 7일 나주 서방 약 20리 월명동(月明洞)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됐다.

김옥내(金玉內 ~1908. 4. 26·전남 곡성군 죽곡면 유봉리 비봉)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곡성·구례·광양·하동·남원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 26일 전남 곡성군 죽곡면 비봉리 (飛鳳里)에서 일본군 북부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됐다.

김문삼(金文三 ~1908. 12. 5·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년부터 조규하(趙圭夏) 의병장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조쥬하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해 김문삼은 의병장이 돼 광주·순천·곡성·구례·하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908년 12월 5일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谷城郡 竹谷面 泰安寺)에서 휘하의병 4명과 체포됐다. 이후 본군은 김문삼과 의병 1명을 총살했다.

◇ 전북 5명
김진명(金辰明·44세, 1863~1907. 12. 1·전북 진안군 진안읍)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전북 진안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0월19일 진안 결찰서와 우체국 등을 습격했다. 이후 그는 12월 1일 일본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참수(斬首·목이 잘려) 순국했다.

박재근(朴在根 ~1907. 12. 28·전북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백암)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의병100여명을 규합, 전북 장수·무주·남원 등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던 중 1907년 12월 27일 장수남방 약50리 백암(百巖)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는 28일 일본군의 모진 고문 끝에 칼에 찔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내구(李內逑 ~1908. 11. 7·전북 전주 남문 외)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기삼연 의진에서 이남규(李南奎)와 이정섭(李丁燮) 등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7일 이남규, 이정섭과 함께 체포돼 3명 모두 총살됐다.

마중길(馬中吉 ~1908. 5. 16·전북 무주군 무풍면 흑석 全北)의병장은 을사늑약(1905)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무풍장(茂豊場) 등지에서 의병장 이장춘(李長春) 등 30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16일 무풍장 북방 천오백미터 흑석(黑石)에서 마중길 의병진 30여명은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장 이장춘, 포장(砲將) 정원준(鄭元俊), 교련관 마중길(馬中吉), 후군장 권병이(權秉貳), 중군장 신모(愼某)외 11명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가 됐다.

안내성(安乃成 ~1909. 1. 16·전북 재동 계수역)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항전했다. 그러던 중 안내성은 1909년 1월 16일 의병 30여명과 함께 계수역(契樹驛) 북방 약 20리 부근인 재동(在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동지 5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인터뷰]독립운동가 발굴·선양 외길 인생 21년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

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망언 등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로의 부활이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항일투사 259명 학살문건 발굴과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한 향토사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정재상(48·악양면)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이다.

그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지리산 독립군 200명 발굴, 전남·광주 3·1독립운동가 48명 발굴, 영·호남 항일투사 70명 발굴, 경남일보에 지리산 항일투사 2년간 연재, 하동의 독립운동사 발간, 지리산 항일투사 335인 기념탑 건립, 무명항일투사 30인 의총비 건립, 독립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EBS다큐멘터리 ‘독백’ 제작방송, KTV스페셜 ‘이름 없는 독립전사를 찾아서’를 제작방송 등 그동안 독립 운동가를 위해 쉼 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최근에는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의 문건을 발굴·공개하고 ‘지리산 항일투쟁영웅 류명국·양문칠’ 전사를 발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항일투사 259명의 학살문건’을 찾아 신원이 확인된 41명의 의병장을 정부에 서훈신청(2014년 2월 4일 진주보훈지청을 통해)했다. 지금까지 그의 노력으로 10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았다. <본보>는 3·1절을 앞두고 그를 특별 인터뷰했다. 정 위원장이 걸어온 21년의 여정을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됐나?
△대학을 졸업(1992년)하고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면서 1993년 지역 주간신문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해 광복절을 맞아 특집으로 지역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돼 총살당한 박매지(박인환) 의병장의 기록을 하동군사를 통해 알게 됐죠.
그런데 군사에는 박매지 의병장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에 불과했습니다. 기록에는 ‘일본군에 체포돼 귀순의 권유에 불복하다 총살됐다’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했고 이 내용만 가지고서는 어떤 기사도 쓸 수 없었죠.
그래서 고민 끝에 이분의 당시기록물부터 수집하는 게 순서라 생각돼 백방으로 뛰어 다니며 기록물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신문에서 박매지 의병장과 함께 활약하다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9년간 복역한 함양출신 권석도 의병장의 항일기록을 찾게 됐었습니다.
나는 이때 아 이제 뭔가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때부터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는데 빠져 들었고 언제 부터인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당시 내 머리 속에는 오직 ‘박매지’ 그 이름 석자만 맴돌았죠. 마음은 벌써 함양으로 달려갔습니다.
다음날 나는 함양의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를 찾았고 여기서 당시 권석도 의병장의 기록을 찾아 서훈을 신청했던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됐습니다. 나는 그분이 함양에 계신 분 인줄 알았는데 서울사람이었죠.
나는 미리 그분의 신상을 파악한 후 어느 해 겨울 서울로 찾아 올라갔습니다. 그때 사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해서 먼저 서울에 있는 고향선배인 이경규(박희태 국회의원 보좌관) 씨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당시 이경규 선배는 여러 가지 일로 무척 바쁜 중이었는데 만사 제쳐두고 고향후배가 올라왔다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때 정말 너무도 고마웠죠. 지금도 늘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리 서울 올라오기 전에 약속한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 정준영 선생을 이경규 선배와 함께 만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정준영 선생은 저와 함께 직접 국가기록원을 찾아 박매지 의병장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됐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박매지 의병장은 그 후 몇 년 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최근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과 이번에 259명의 학살문건을 발굴했는데 어떻게 찾게 됐나?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는 의병장들의 문집류와 국가기록원, 대학도서관, 문화원, 읍면사무소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합니다.
이번 문건은 국가기록원자료인 폭도에 관한 편책과 LH토지주택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중일지(일본군 보병이 작성)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편집한 조선폭도 토벌지 등에서 찾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폭도에 관한 편책과 조선폭도 토벌지, 진중일지는 어떤 기록물입니까?
△한마디로 의병을 탄압한 일본 측의 자료입니다. 폭도에 관한 편책은 총 121책의 방대한 양으로 의병에 관한 보고서를 월별로 경무국에서 편책한 일본 측의 의병탄압 일지입니다. 현재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각기 소장돼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폭도 토벌지는 1913년 조선 주차군사령부가 편집한 자료입니다.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영·호남지역 의병학살에 참여한 일본군 보병 12사단 14연대에서 작성한 것으로, 총14권으로 돼 있으며 1907년 7월 23일부터 1909년 6월 19일까지 2년간의 기록입니다. 2010년 최근에 입수된 자료입니다.

-항일투사 117인과 259인 학살문건에 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은 한말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1909년 말까지 지리산일대인 하동, 산청, 함양, 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치르다 일본군의 지리산 대 토벌 작전 때 전사한 무명 항일투사입니다.
이분들은 경남창의대 소속으로 산청출신 박동의 대장과 경북 영천출신 이학로 의병장, 류명국·양문칠 의병진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인은 강원도 출신부터 영호남 출신의병장으로 이분들도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 때 일본군에 체포돼 희생된 분들입니다.

-이중에 공적이 가장 뛰어난 분을 한두 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항일투사들의 나라사랑정신과 민족애를 생각하면 이분들의 공훈의 높낮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경남 하동의 정승유 의병장과 전남 곡성의 손학곤 의병장, 전북 장수출신의 박재근 의병장을 들 수 있습니다.
하동출신 정승유 의병장은 휘하의병100여명과 함께 지리산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결사항전하다 1908년 7월 초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그는 하동경찰서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동지들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또 다시 체포돼 일본군에 총살당했습니다.
전남 곡성의 손학곤 의병장 또한 150여명의 의병대를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으나 1908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그는 체포된 후 모진고문을 당한 후 머리가 박살나 처참하게 순국했습니다.
전북 장수의 박재근 의병장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을 펼치다 1907년 12월 체포됐습니다. 그는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일본군의 칼에 찔려 잔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말 이분들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확인할 때 제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이분들의 공적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동안 많은 독립운동가를 찾은 것으로 아는데 지금까지 몇 명이나 찾고 몇 분이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나?
△아마 500명이 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포장을 받은 분은 100여명쯤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힘들었던 일은?
△그동안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사들을 많이 발굴하고 많은 분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정작 경남에서 제일 높은 경남 창의대장인 박동의 의병장은 2010년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기록을 찾기 위해 수년간 곳곳을 뛰어다녔으나 허사였습니다. 산청출신 경남창이대장을 산청에 가서 물어봐도 아는 분이 없었으니 그분의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요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죠.
그러던 중 2007년 국가기록원에서 박동의 의병장의 체후관련 문건을 찾았습니다. 이때 정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분의 최후 기록을 찾았으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기록에는 ‘박동의를 1908년 10월 17일 산청군 덕산에서 체포해 목을 베어 죽였다’고 했습니다. 정말 몸서리 처지는 일 아닙니까? 경남 창의대장의 최후는 일제에 의해 이렇게 잔혹하게 끝났습니다.
이런 분이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묻혀 있었고 이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로만 광복, 말로만 순국선열을 부르짖었으니 참으로 한심하죠.
제가 그해 자료를 정리해서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깜깜무소식. 3년이 지난 후 2011년에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정만 긴 세월이었죠.
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는 광복이후 무려 66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겁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력 순위 15위입니다. 이제 국민들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유가족에게 국가가 보훈해야할 때입니다.

-독립유공자 발굴 외에도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아는데 좀 소개해 주신다면.
△지리산 항일투사기념탑을 하동군 악양면에 2008년 건립했습니다. 이 기념탑에는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전사 순국한 대표적 항일의병장 335인과 무명항일투사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시 제가 기념사업회장을 맞아 일을 추진했는데 지리산 인근 영호남 지역 17개 시군민이 참여해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 의신에서 순국한 무명항일투사 30인 의총비를 하동군의 도움으로 2011년 세웠습니다.
2004년에는 독립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EBS 다큐멘터리 ‘독백’을 제작방송했고, 2007년에는 KTV스페셜 ‘이름 없는 독립전사를 찾아서’를 제작, 현충일과 광복절에 각각 방송했습니다.
그밖에 경남일보에 지리산 항일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기획특집 ‘정재상이 전하는 지리산의 독립운동’을 2007년과 2008년 2년간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2000년에는 ‘하동의 독립운동사’를 발간했고 최근에는 ‘지리산 항일영웅 류명국·양문칠 장군’의 전사를 발간했습니다.
지금은 ‘지리산 항일투쟁사’를 집필 중이며, 류명국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류명국 의병장 공훈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독립운동가 발굴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많은 경비가 소요됐을 텐데 어떻게 마련했나?
△경비보다는 오히려 노력이 많이 들었다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가 발굴을 하면서 오직 나의 사명감으로 이일을 해 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남을 위해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힘이 미칠 때 까지는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념탑 및 비 건립, 책 발간 등은 지역의 선후배와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아 추진했습니다.

-가족들의 불만은 없었는가?
△이 일을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일이라서 그런지 제 집사람과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서로 자긍심과 보람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일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양봉을 하고 있습니다. 벌을 키우고 있죠. 꽃따라 철따라 봄이 되면 경남 사천에서 경기도 안성, 강원도 철원까지 대한민국을 1년에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큰 수입은 안 되지만 먹고는 삽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지리산 항일투쟁사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내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책이 출간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연구 등의 공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상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정말 제가 한일에 비하면 너무도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2007년에는 국가보훈문화상과 향토문화상을 받았고, 2011년에 하동군 군민상 등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노력 하라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망언을 일삼을 때 정말 분노를 느끼고 온몸에 핏대가 섭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정신 바짝 차려야지요. 그리고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를 위해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보훈해야 합니다. 누가 이 땅을 지켰습니까? 누가 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까?
순국 선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이토록 잘하는 강국이 됐겠습니까? 이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유족에게 국민 모두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젠 우리가 그분들에게 보답할 때입니다.
오정미 기자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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