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고 경아연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촉구 서명운동
작성 : 2010년 05월 10일(월) 10:33 가+가-
최근 일제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북 경주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경아연’이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는 말과 함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경아연’ 이 보내온 글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뜻하는 용어로 1994년 ‘여자 정신 근로령’ 이 제정되면서부터 일반화 되었는데, 우리가 쉽게 혼동하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는 다른 것이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는 다르게 군수공장에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이 쉽게 둘을 혼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군위안부들은 처음에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였으나 보초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못낸 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하루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당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위안부'들을 손으로 때리거나 칼로 찌르기도 했다.
위안부들은 일제가 패전하자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한데 모아 죽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했던 경우도 많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 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버려져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군대와 함께 영광의 죽음을 하도록 강요되거나, 동굴에 모여져서 폭탄을 터트려 죽임을 당하거나, 연합군에게 넘겨져서 또다시 봉사하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정신대는 매주 수요일 12시에 정기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아울러 한국정부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유엔 등 국제기관 및 단체들과 다른 아시아 피해국과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생존자복지위원회를 두어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자의 생활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역사왜곡 교과서를 펴내는 새역모의 위원들은 “위안부는 역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이 못된다. 방 안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방이 지저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죄 많은 일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더러운 일본인이라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게 가르칠 순 없다. 위안부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은 같은 민족이었다. 자기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가고 공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하곤 한다.
이제는 잊지 말아요
경아연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제 할머니들은 단 86명만 남아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다”며 서명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는 말과 함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경아연’ 이 보내온 글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뜻하는 용어로 1994년 ‘여자 정신 근로령’ 이 제정되면서부터 일반화 되었는데, 우리가 쉽게 혼동하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는 다른 것이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는 다르게 군수공장에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이 쉽게 둘을 혼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관리자들은 군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일본말로 '身も心も棒ぐ 大和撫子のサ-ウス(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의 서비스란 뜻)'이라거나 '聖戰大勝の 勇士大歡迎(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등의 선전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군위안부들은 처음에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였으나 보초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못낸 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하루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당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위안부'들을 손으로 때리거나 칼로 찌르기도 했다.
위안부들은 일제가 패전하자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한데 모아 죽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을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했던 경우도 많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 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버려져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군대와 함께 영광의 죽음을 하도록 강요되거나, 동굴에 모여져서 폭탄을 터트려 죽임을 당하거나, 연합군에게 넘겨져서 또다시 봉사하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정신대는 매주 수요일 12시에 정기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아울러 한국정부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유엔 등 국제기관 및 단체들과 다른 아시아 피해국과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생존자복지위원회를 두어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자의 생활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역사왜곡 교과서를 펴내는 새역모의 위원들은 “위안부는 역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이 못된다. 방 안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방이 지저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죄 많은 일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더러운 일본인이라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게 가르칠 순 없다. 위안부 그 당시 일본과 한국은 같은 민족이었다. 자기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가고 공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하곤 한다.
이제는 잊지 말아요
경아연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제 할머니들은 단 86명만 남아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다”며 서명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