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라인▽
아파트 한 채 값(?) 서예 '名品' 시청에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
작성 : 2007년 08월 14일(화) 11:48 가+가-
며칠전 거제시청 3층 도시과에 들려 몇 가지를 물어보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2층 중회의실 입구에 걸린 붓글씨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액자가 걸려 있는 것도 까맣게 잊고 중회의실에서 기자회견도 여러번 취재했다.
시청 중회의실 입구에 걸려 열암 송정희 선생이 직접 쓴 '관청민자안'

추사체 같기도 한 독창적인 글씨였다. 기자는 붓글씨에 문외한(門外漢)이지만 범상치 않은 글씨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용은 차치(且置)하고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있는 글씨체가 아버지의 ‘엄한 회초리’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붓글씨 내용은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이었다. 누가 썼는지 호와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짧은 한문실력으로 유려한 필체 해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부서에 들려 S공무원에게 누가 썼는지 물어보았지만, 잘 모른다고 했다. 까맣게 잊고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지난 10일 기자 휴대폰으로 ‘관청민자안, 서예가 열암 송정희 선생, 유명하신 분, 인터넷 검색 요망’이라는 문자메세지가 왔다. 핸드폰 번호를 보니 며칠전에 “모른다”고 말한 S공무원이 보낸 문자메세지였다.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일요일인 12일, 집에서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부터 인터넷 검색을 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장원급제한 한시(漢詩)로 5언절구(五言絶句)였다.

‘국정천심순(國正天心順)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 처현부과소(妻賢夫過少) 자효부심관(子孝父心寬).’

“나라가 바르면 천심(天心)도 순응할 것이요. 목민관(牧民官)이 청렴하면 백성은 저절로 편안할 것이다. 아내가 현명하면 남편의 허물이 적게 나타날 것이요. 자식이 효도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너그러워지느니라.”
2006년 독일월드컵 태극전사들의 왼쪽 가슴에 새긴 '투혼'

그 다음에 ‘열암 송정희’라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검색창에 열암(列菴) 송정희(宋正熙) 선생과 관련된 내용이 주~욱 펼쳐졌다.

“8월 20일부터 SBS에서 방영 예정인 대하사극 ‘왕과 나’ 제호를 열암 송정희 선생이 흔쾌히 적어주었다”는 기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인터넷 화면 밑으로 내려가자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태극 전사들의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鬪魂)’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적어주었다” 등 굵직굵직한 기사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하늘기운이 모이니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인 ‘천기운집 여민동락(天氣雲集 與民同樂)’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태양빛과 달빛이 온 세상을 비추어 만물에 혜택을 준다’는 ‘희휘랑요(羲暉朗曜)’를 각각 선물했다”는 모 신문의 내용도 볼 수 있었다.

“99년 고려대학교 100주년 때 서예 작품 5,000점을 기증했는데, 시가로 200억원에 상당하다.”는 기사도 있었다.

“예술은 부(富)를 추구하는 순간 순수성을 잃고 맙니다. 마음이 탁해져 제대로 된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죠.”라고 모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 남긴 열암 송정희 선생의 한마디는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교훈이었다.

‘열암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시킨 서예의 대가였다.

여러 관련 기사를 보는 가운데 느낀 점은 ‘서예와 인품이 일치하는’ 흔치않은 참선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돈을 쫒기 보다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켜가지 않는 열암 선생의 굵직한 묵흔(墨痕)이 느껴졌다.

13일 시청을 방문하니 열암 선생의 다른 글이 민청관자안과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하나 더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내용을 보았다. 한글로 ‘미소는 거제 하늘처럼, 친절은 거제 바다만큼’ 붓글씨였다. 한참을 쳐다봤다.
시청 브리핑룸 옆에 걸려 있는 열암 선생의 또 다른 작품

‘섬병원’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 거제 ‘백병원(白病院)’ 상호도 열암 선생이 쓴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서예와 인품이 일치하는’ 또 한사람의 서예 대가에 관한 이야기도 위에서 언급한 S공무원과 관련이 있어 잠시 소개한다.

7월 모 일에 S공무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았는지 물었다. 못 읽어봤다고 했다.

“한번 읽어보시면 좋은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성경을, 절에 다니는 신자는 불경을 ‘바이블’로 삼듯이, 기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바이블로 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 100번은 넘게 읽었을 것이라는 점도 곁들이면서...”

그 후에 시청을 방문하니 S공무원이 시청 도서관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빌려 읽고 있었다. 똑같은 제목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책 종류는 4가지 정도이다. “활자화된 책은 좀 지루할테니 이책으로 한번 읽어보시오”하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원본격인 ‘엽서’를 권했다.

‘엽서’는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원문이 그대로 실려 있는 책이다. 출옥 후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원문을 모아 책으로 몇 권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눠준 책이다. 기자도 운좋게 한권을 가지고 있어 S공무원에게 권했다. 책은 아직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진 쇠귀(牛耳)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서예가로써도 유명하다. 두산소주에서 파는 ‘처음처럼’ 소주 상호를 쓴 사람이다. 물론 돈 한 푼 받지 않고 써주었다. 그 대신 두산소주에서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원을 쾌척했다.
신영복 석좌교수가 쓴 두산소주 상호 '처음처럼'

우이(牛耳) 선생은 20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한글 서체를 창조했다. 감옥에 있는 자식에게 보낸 어머니 편지 필체를 모필(母筆)로 삼아 독특한 한글서체인 ‘연대체’를 완성시켰다. ‘민(民)체’, ‘더불어체’라고도 한다. 조정래 소설 한강의 제호, 부산민주항쟁기념공원 초석, TV인물현대사, 고 김주열 열사 추모비, TV뉴스 플러스 ‘암니옴니’ 등 여러 곳에 신영복 교수의 붓글씨가 살아 있다.

우이 선생은 ‘서예와 나’라는 글에서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臨書)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시청을 다시 찾아 S공무원과 함께 열암 선생의 글씨를 바라보면서 ‘관청민자안’ 내용과 ‘명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몇 시간 보내도 아깝지 않을 듯싶다.
김철문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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