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가 남긴 달갑잖은 과제 ‘친일’
작성 : 2007년 12월 29일(토) 22:36 가+가-

“‘친일의혹’과 ‘문학적 가치판단’은 달라야 한다. 청마 유치환은 불행한 시기(일제)에 살다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학가일 뿐이다. 친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을 뿐이지 현재로선 ‘친일이다’거나 또는 ‘아니다’ 라고 단정할 수 있는 상황은 없다.”
“불행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은 많다. 그러나 불행한 시기를 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청마와 같은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청마의 친일논란은 논란이 아니라 학술적인 차원에서라도 사실관계를 규명해야 한다.”
29일 오후2시 경남 통영시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본관 1층 강당에서 개최된 ‘청마 유치환의 친일논란에 대한 학술토론회’는 친일에 대한 정의와 유치환의 시가 발표됐던 시대적 상황, 작품에 대한 토론자들의 이견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청마기념사업을 추진 중인 통영예총 측 토론자로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복거일 소설가, 홍정선 인하대교수가 나섰고 이 사업을 반대하는 시민연대는 김재용 원광대교수, 박태일 경남대교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친일파에 대한 정의 두고 설전
토론자들은 친일파의 정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본과 친하게 지냈다” 또는 “그들의 침탈정책을 지지, 옹호, 추종하는 정도가 어디까지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의 ‘매국적 친일’ 과 이후의 친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세뇌시켜 조선인에게 일체의 재산과 목숨마저 바치라고 외친 친일세력은 분명 전범 내지 전쟁협력행위자로서 매국적 친일과 뚜렷이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복거일 문학평론가는 철학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친일파와 친일행위를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법적으로 일본제국의 국민들이었으며 식민통치 조직에의 참여여부를 떠나 선택의 여지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친일이라면 적어도 불법적이고 자발적이며 조선인들에게 해로웠어야 하는 세가지 조건을 충족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마의 만주행 그리고 만주제국협화회
청마가 고향 통영을 떠나 만주(연수)행을 택한다. 청마의 만주행이 자신의 삶과 생명을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는지, 집안일로 쫒겨갔던, 개인적인 도주이든 중요하지 않다.
청마가 만주에서 ‘만주제국협화회’에 근무했던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청마의 만주제국협화회 근무전력은 김소운의 조선시집 중기에 적혀있다. 논란은 만주제국협화회가 ‘친일’이라는데 있다.
박태일 경남대교수는 만주제국협화회는 “관동군사령부의 지도아래 세워진 뒤 곳곳에 지주.상인들과 같은 지배층을 입회시켰다. 협화회분회 활동은 정치적(선무공작), 경제적(상호부조, 공존공영에 기댄 경제사회의 창설), 사회적(건국정신의 보급철저), 인격도야, 훈련 수양 등 사상적(교화적 실천)인데까지 폭이 넓었다. 사상교화뿐만 아니라 인력동원과 수탈을 지도하며 폭넓은 ‘치안숙정공작’을 펼쳤던 기구였다” 고 자료를 인용했다.
이에 대해 홍정선 인하대교수는 “당시 청마가 살았던 연수의 협화회에는 25세 이상의 사람이 모두 의무적으로 협화회에 가입해야 했다. 개척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비적이 자주 출몰한 이 지역에서는 자위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협화회 가입이 강요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연수현 정부에서 간행한 자료집 간부명단에서 청마를 찾아내지 못했다” 며 “김소운이 조선시집에 적어놓은 협화회 근무라는 단어만을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청마와 ‘수’,‘북두성’,‘전야’
청마의 친일논란의 핵심은 그가 발표한 작품의 친일논란이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유치환은 친일협력을 보여주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유치환의 친일문학 논란은 현재 ‘수’라는 작품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작품 ‘수’에 등장하는 만주국 정부에 의해 목이잘린 ‘비적’이 독립투사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토비’인지가 친일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1943년 12월 유치환은 학도병참여를 권유하는 글을 특집으로 실은 ‘춘추’지에 ‘전야’를 실었으며 ‘전야’는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되는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1944년 4월 ‘조광’에 실린 ‘북두성’을 두고 그는 ‘전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아세아의 산맥을 넘어서/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 로 끝나는 이 작품은 서구 근대를 극복한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축원하는 시라고 소개했다.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은 1942년 2월 6일 만선일보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통해 태평양전쟁이 지닌 의의와 황국신민 된 공감을 표현했다고 강조했다.
김재용 교수는 “친일협력 문학의 논리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차별극복으로서의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 근대의 극복으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론’인데 유치환은 바로 이 후자에 속하는 친일작가라고 주장했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는 청마의 ‘수’에 대한 친일의혹은 막연한 추측이라고 단정지었다.
청마가 살았던 지역에는 독립군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독립군은 1930년 이전에 해체됐다. 오히려 ‘수’에 나오는 비적은 정판룡 연변대학 총장이 회고록에서 토비를이 욱실거렸다고 한 증언에서처럼 말 그대로 비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북두성’과 ‘전야’는 “이 두 작품이 친일성향의 잡지에서 발표됐다는 점과 작품의 내용이 친일적이라는 점 두가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며 “당시 1940년대에 간행된 우리나라 잡지 중 친일성향을 띄지 않은 잡지가 없었다. 친일성향의 잡지에 작품발표한 것 만으로 친일로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두성’은 북극의 풍경을 시로 쓴 작품이다. ‘아세아의 산맥넘애서/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 는 구절을 대동아 공영권 수립을 축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해방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전야’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기 바라는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고 덧 붙였다.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시는 읽는다는 것은 미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의도며 생각에 따라 일방적으로 읽혀지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다” “시는 모호성이 있고 상관성이 있으며 시대와 역사 그리고 시인 개인의 전기, 인생관, 가치관 등이 담겨있다.”
“청마의 무려 열 한편의 시집이 이루고 있는 청마 개인의 시의 역사에서 일관된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는 그가 시적인 서정과 인간 의지며 결단의 표백을 공명케 하려는 바로 그 동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만선일보’의 그 짧은 기사하나를 대서특필하려는 경향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즘과 스스로 나서서 야합한 하이데거는 그 잘못이 지적되는 일방, 여전히 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로 일컬어지고 교향악 지휘자 훌트벵글러 역시 나치즘 동조에도 불구 위대한 음악가로 존경받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청마 기념사업 추진 바람직한가
복거일 문학평론가= “친일행위를 또렷이 정의하기 어렵고 친일행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친일행위들과 친일파에 대해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만한 법적 도덕적 권위를 지닌 것도 아니다. 이런 사정은 친일문제가 아주 어려운 방법론적 문제를 품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 “나는 청마가 인격적으로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사소한 흠을 문제삼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 훌륭한 많은 것 들을 깔아뭉게거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유치환은 분명 친일협력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환의 이러한 친일흔적들을 애써 외면하고서는 유치환 연구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한국근대시문학사에 그가 갖는 공을 없애겠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유치환 시의 공과를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따지고 그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실장=“청마의 친일논란은 이미 고인이 된 청마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겨놓은 달갑잖은 숙제일 수도 있다. 문학.예술분야의 친일행위는 이데올로기 분야였다. 집단적 대중적 영향력이 더욱 크다는 말이다. 기념사업또한 이데올로기 사업의 하나이다. 청마기념관은 청마만의 공간이 아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끊임없이 대를 이어 방문하고 기념주체의 삶을 공감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나침반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공간이다. 충분한 의견을 나누고 서로 합의에 이르는 지혜로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기념관보다는 문학관이
박한용 실장은 마산 조두남음악관이 마산문학관으로 변경되는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소개했다. “미당문학관 안에는 미당의 친일시를 가감없이 전시해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미당의 삶 전체의 궤적을 둘러보면서 그의 친일사도 같이 보고 스스로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한 토론회 참석자는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다면 문학관이나 기록관으로 충분하다. 구태여 기념관이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문학도 역사도 존중받아야 한다. 통영시도 시비까지 들여가며 시민적 합의도 구하지 않은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인근 거제시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결과”라고 말했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불행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은 많다. 그러나 불행한 시기를 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청마와 같은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청마의 친일논란은 논란이 아니라 학술적인 차원에서라도 사실관계를 규명해야 한다.”
29일 오후2시 경남 통영시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본관 1층 강당에서 개최된 ‘청마 유치환의 친일논란에 대한 학술토론회’는 친일에 대한 정의와 유치환의 시가 발표됐던 시대적 상황, 작품에 대한 토론자들의 이견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청마기념사업을 추진 중인 통영예총 측 토론자로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복거일 소설가, 홍정선 인하대교수가 나섰고 이 사업을 반대하는 시민연대는 김재용 원광대교수, 박태일 경남대교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친일파에 대한 정의 두고 설전
토론자들은 친일파의 정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본과 친하게 지냈다” 또는 “그들의 침탈정책을 지지, 옹호, 추종하는 정도가 어디까지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합방 이전의 ‘매국적 친일’ 과 이후의 친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세뇌시켜 조선인에게 일체의 재산과 목숨마저 바치라고 외친 친일세력은 분명 전범 내지 전쟁협력행위자로서 매국적 친일과 뚜렷이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복거일 문학평론가는 철학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친일파와 친일행위를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법적으로 일본제국의 국민들이었으며 식민통치 조직에의 참여여부를 떠나 선택의 여지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친일이라면 적어도 불법적이고 자발적이며 조선인들에게 해로웠어야 하는 세가지 조건을 충족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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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만주행 그리고 만주제국협화회
청마가 고향 통영을 떠나 만주(연수)행을 택한다. 청마의 만주행이 자신의 삶과 생명을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는지, 집안일로 쫒겨갔던, 개인적인 도주이든 중요하지 않다.
청마가 만주에서 ‘만주제국협화회’에 근무했던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청마의 만주제국협화회 근무전력은 김소운의 조선시집 중기에 적혀있다. 논란은 만주제국협화회가 ‘친일’이라는데 있다.
박태일 경남대교수는 만주제국협화회는 “관동군사령부의 지도아래 세워진 뒤 곳곳에 지주.상인들과 같은 지배층을 입회시켰다. 협화회분회 활동은 정치적(선무공작), 경제적(상호부조, 공존공영에 기댄 경제사회의 창설), 사회적(건국정신의 보급철저), 인격도야, 훈련 수양 등 사상적(교화적 실천)인데까지 폭이 넓었다. 사상교화뿐만 아니라 인력동원과 수탈을 지도하며 폭넓은 ‘치안숙정공작’을 펼쳤던 기구였다” 고 자료를 인용했다.
이에 대해 홍정선 인하대교수는 “당시 청마가 살았던 연수의 협화회에는 25세 이상의 사람이 모두 의무적으로 협화회에 가입해야 했다. 개척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비적이 자주 출몰한 이 지역에서는 자위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협화회 가입이 강요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연수현 정부에서 간행한 자료집 간부명단에서 청마를 찾아내지 못했다” 며 “김소운이 조선시집에 적어놓은 협화회 근무라는 단어만을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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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와 ‘수’,‘북두성’,‘전야’
청마의 친일논란의 핵심은 그가 발표한 작품의 친일논란이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유치환은 친일협력을 보여주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유치환의 친일문학 논란은 현재 ‘수’라는 작품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작품 ‘수’에 등장하는 만주국 정부에 의해 목이잘린 ‘비적’이 독립투사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토비’인지가 친일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1943년 12월 유치환은 학도병참여를 권유하는 글을 특집으로 실은 ‘춘추’지에 ‘전야’를 실었으며 ‘전야’는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되는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1944년 4월 ‘조광’에 실린 ‘북두성’을 두고 그는 ‘전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아세아의 산맥을 넘어서/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 로 끝나는 이 작품은 서구 근대를 극복한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축원하는 시라고 소개했다.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은 1942년 2월 6일 만선일보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통해 태평양전쟁이 지닌 의의와 황국신민 된 공감을 표현했다고 강조했다.
김재용 교수는 “친일협력 문학의 논리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차별극복으로서의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 근대의 극복으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론’인데 유치환은 바로 이 후자에 속하는 친일작가라고 주장했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는 청마의 ‘수’에 대한 친일의혹은 막연한 추측이라고 단정지었다.
청마가 살았던 지역에는 독립군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독립군은 1930년 이전에 해체됐다. 오히려 ‘수’에 나오는 비적은 정판룡 연변대학 총장이 회고록에서 토비를이 욱실거렸다고 한 증언에서처럼 말 그대로 비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북두성’과 ‘전야’는 “이 두 작품이 친일성향의 잡지에서 발표됐다는 점과 작품의 내용이 친일적이라는 점 두가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며 “당시 1940년대에 간행된 우리나라 잡지 중 친일성향을 띄지 않은 잡지가 없었다. 친일성향의 잡지에 작품발표한 것 만으로 친일로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두성’은 북극의 풍경을 시로 쓴 작품이다. ‘아세아의 산맥넘애서/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 는 구절을 대동아 공영권 수립을 축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해방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전야’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기 바라는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고 덧 붙였다.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시는 읽는다는 것은 미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의도며 생각에 따라 일방적으로 읽혀지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다” “시는 모호성이 있고 상관성이 있으며 시대와 역사 그리고 시인 개인의 전기, 인생관, 가치관 등이 담겨있다.”
“청마의 무려 열 한편의 시집이 이루고 있는 청마 개인의 시의 역사에서 일관된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는 그가 시적인 서정과 인간 의지며 결단의 표백을 공명케 하려는 바로 그 동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만선일보’의 그 짧은 기사하나를 대서특필하려는 경향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즘과 스스로 나서서 야합한 하이데거는 그 잘못이 지적되는 일방, 여전히 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로 일컬어지고 교향악 지휘자 훌트벵글러 역시 나치즘 동조에도 불구 위대한 음악가로 존경받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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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기념사업 추진 바람직한가
복거일 문학평론가= “친일행위를 또렷이 정의하기 어렵고 친일행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친일행위들과 친일파에 대해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만한 법적 도덕적 권위를 지닌 것도 아니다. 이런 사정은 친일문제가 아주 어려운 방법론적 문제를 품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 “나는 청마가 인격적으로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사소한 흠을 문제삼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 훌륭한 많은 것 들을 깔아뭉게거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유치환은 분명 친일협력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환의 이러한 친일흔적들을 애써 외면하고서는 유치환 연구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한국근대시문학사에 그가 갖는 공을 없애겠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유치환 시의 공과를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따지고 그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실장=“청마의 친일논란은 이미 고인이 된 청마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겨놓은 달갑잖은 숙제일 수도 있다. 문학.예술분야의 친일행위는 이데올로기 분야였다. 집단적 대중적 영향력이 더욱 크다는 말이다. 기념사업또한 이데올로기 사업의 하나이다. 청마기념관은 청마만의 공간이 아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끊임없이 대를 이어 방문하고 기념주체의 삶을 공감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나침반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공간이다. 충분한 의견을 나누고 서로 합의에 이르는 지혜로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기념관보다는 문학관이
박한용 실장은 마산 조두남음악관이 마산문학관으로 변경되는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소개했다. “미당문학관 안에는 미당의 친일시를 가감없이 전시해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미당의 삶 전체의 궤적을 둘러보면서 그의 친일사도 같이 보고 스스로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한 토론회 참석자는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다면 문학관이나 기록관으로 충분하다. 구태여 기념관이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문학도 역사도 존중받아야 한다. 통영시도 시비까지 들여가며 시민적 합의도 구하지 않은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인근 거제시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결과”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