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바다' 지세포의 늦겨울 풍경
작성 : 2004년 02월 25일(수) 00:00 가+가-
"아저씨, 여기 사십니까?" "예, 여기 참 좋죠."
모자를 눌러쓰고 부둣가로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에게 물으니 말을 건네는 폼이 무척 친근하다. 원래 고향은 산청이라는 그는 첫마디부터 지세포 자랑을 늘어 놓는다.
"9년전 구경삼아 놀러왔다 이곳이 좋아 그냥 눌러 살게되었다"는 그는 거제 곳곳을 둘러 보았으나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단다. 그의 자랑이 그냥 빈 말은 아닌 것 같다.
옥녀봉과 북병산 끝자락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지세포는 어머니 품같은 포근한 인상을 준다. 네모난 항아리 모양을 한 지세포만은 옥림, 소동, 지세포리를 한 품안에 두고 높고 낮은 산들이 사방으로 둘러 싸고 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나 작년 매미가 내습했을 때에도 별 피해가 없었던 지세포는 천혜의 항구로 피항지 노릇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본으로 가던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이 잔잔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워 대마도로 향했다고 한다.
조선 효종 2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선창마을 뒷산에 성을 쌓은 다음 옥포성 밖에 있던 진영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선창마을 뒷산에 가면 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는 물이 깨끗해 가끔 요앞에서 고기들이 펄떡 펄떡 뛰어 다니는게 보이지. 은빛 고기들이 햇빛에 비칠 때면 눈이 부실지경이지." 이 마을에 산다는 김씨 노인은 바다를 가리키며 상념에 잠기는 표정을 한다.
"땅지자에 세상세자지 아마.
그래, 지세포에는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지.
그래 한국전쟁때도 전쟁포로들이 여기까지 왔었지. 사람 살기 좋은 곳이지.
" 지세포 유래를 물으니 그럴 듯이 말을 이어 나간다.
엊그제 비가와서 그런지 하늘은 더 높고 푸르다. '봄이 오는 이 길목에서,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섬들 사이로 고깃배가 한가로이 춤추고, 그 위로 유유히 날아가는 갈매기떼의 무리를 보고 싶었는데…' 아뿔싸, 오늘따라 그런 낭만의 바다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갈매기 무리도 온데간데 없다.
마을 뒤로 대형 관광버스들이 가끔 지나가고 넓은 포구에는 소형 어선들이 한가롭게 졸고 있다. 그 옆으로 제법 큰 멸치 운반선이 턱 버티고 서 있다.
"어르신,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습니까?"
"거, 사진 찍어서 머할라꼬?"
부두 한켠에서 어망을 손질하는 한 어부에게 다가가자 낯선 나그네의 등장에 호기심이 동한 듯 말문을 연다.
"허허, 이왕이면 잘 나오게 찍어 주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꾸를 한다. 날이 풀리면 숭어잡이 나간다며 어망 손질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부둣가에 서서 북병산을 보니 그 아래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지난해 개관한 거제어촌민속전시관이었다. 2천여평의 넓은 부지에 2층 건물로 된 어촌전시관은 옛 어부들의 전통생활과 체험의 바다 등 테마별 전시공간과 영상실, 대형수족관 등으로 구성돼 있어 잊혀져 가는 어촌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저 멀리 옥림아파트가 건너다 보이는 산아래 바닷가 포구에는 소형 채낚기 어선과 무동력선이 방파제에 길게 늘어서 있고 문어잡이 통발을 손질하는 아낙의 마음이 무척 여유롭다.
유원지에서나 있음직한 노 젖는 배들이 여러척 보이는데 낚시배라고 한다. 포구가 호수처럼 잔잔하니 배를 띄워 노를 저을 법도 하다.
선창마을에서 바라본 옥녀봉은 그 고운 자태가 물위에 어린다.
물이 빠지자 마을 아낙들이 갯벌로 나가 바지락을 캐느라 여념이 없다.
귓전으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지세포에서는 봄이 오고 있었다.
■ 덧붙이기
·지세포성(知世浦城,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235-4번지) 지난 98년 경남도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된 지세포성은 조선 인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영남 6부의 2만5천명을 동원해 선창성을 쌓고 그 성 아래 수군 만호를 두어 진방하게 했다. 임진왜란 때 만호 강지욱(姜志昱)이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성을 함락당해 옥포성 밖으로 쫓겨났다가 1650년(효종 2) 다시 돌아왔는데 성 입구에 그때의 수군 만호 비석이 남아 있다.
지세포 앞 선창마을 뒤편에 있으며 현재 동쪽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전답의 축대나 가옥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이 있고 그 사이에 성루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성 안팎이 모두 전답과 임야 등으로 바뀌었다.
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모자를 눌러쓰고 부둣가로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에게 물으니 말을 건네는 폼이 무척 친근하다. 원래 고향은 산청이라는 그는 첫마디부터 지세포 자랑을 늘어 놓는다.
"9년전 구경삼아 놀러왔다 이곳이 좋아 그냥 눌러 살게되었다"는 그는 거제 곳곳을 둘러 보았으나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단다. 그의 자랑이 그냥 빈 말은 아닌 것 같다.
옥녀봉과 북병산 끝자락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지세포는 어머니 품같은 포근한 인상을 준다. 네모난 항아리 모양을 한 지세포만은 옥림, 소동, 지세포리를 한 품안에 두고 높고 낮은 산들이 사방으로 둘러 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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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꽃이 꽃망울을 터뜨린 뒤로 빨간등대가 보인다. |
1959년 사라호 태풍이나 작년 매미가 내습했을 때에도 별 피해가 없었던 지세포는 천혜의 항구로 피항지 노릇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본으로 가던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이 잔잔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워 대마도로 향했다고 한다.
조선 효종 2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선창마을 뒷산에 성을 쌓은 다음 옥포성 밖에 있던 진영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선창마을 뒷산에 가면 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는 물이 깨끗해 가끔 요앞에서 고기들이 펄떡 펄떡 뛰어 다니는게 보이지. 은빛 고기들이 햇빛에 비칠 때면 눈이 부실지경이지." 이 마을에 산다는 김씨 노인은 바다를 가리키며 상념에 잠기는 표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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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선과 FRP선을 주로 건조하는 지세포 조선소. |
"땅지자에 세상세자지 아마.
그래, 지세포에는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지.
그래 한국전쟁때도 전쟁포로들이 여기까지 왔었지. 사람 살기 좋은 곳이지.
" 지세포 유래를 물으니 그럴 듯이 말을 이어 나간다.
엊그제 비가와서 그런지 하늘은 더 높고 푸르다. '봄이 오는 이 길목에서,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섬들 사이로 고깃배가 한가로이 춤추고, 그 위로 유유히 날아가는 갈매기떼의 무리를 보고 싶었는데…' 아뿔싸, 오늘따라 그런 낭만의 바다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갈매기 무리도 온데간데 없다.
마을 뒤로 대형 관광버스들이 가끔 지나가고 넓은 포구에는 소형 어선들이 한가롭게 졸고 있다. 그 옆으로 제법 큰 멸치 운반선이 턱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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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망 손질을 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무척 여유롭다. |
"어르신,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습니까?"
"거, 사진 찍어서 머할라꼬?"
부두 한켠에서 어망을 손질하는 한 어부에게 다가가자 낯선 나그네의 등장에 호기심이 동한 듯 말문을 연다.
"허허, 이왕이면 잘 나오게 찍어 주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꾸를 한다. 날이 풀리면 숭어잡이 나간다며 어망 손질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부둣가에 서서 북병산을 보니 그 아래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지난해 개관한 거제어촌민속전시관이었다. 2천여평의 넓은 부지에 2층 건물로 된 어촌전시관은 옛 어부들의 전통생활과 체험의 바다 등 테마별 전시공간과 영상실, 대형수족관 등으로 구성돼 있어 잊혀져 가는 어촌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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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문을 연 거제어촌민속전시관 전경. |
저 멀리 옥림아파트가 건너다 보이는 산아래 바닷가 포구에는 소형 채낚기 어선과 무동력선이 방파제에 길게 늘어서 있고 문어잡이 통발을 손질하는 아낙의 마음이 무척 여유롭다.
유원지에서나 있음직한 노 젖는 배들이 여러척 보이는데 낚시배라고 한다. 포구가 호수처럼 잔잔하니 배를 띄워 노를 저을 법도 하다.
선창마을에서 바라본 옥녀봉은 그 고운 자태가 물위에 어린다.
물이 빠지자 마을 아낙들이 갯벌로 나가 바지락을 캐느라 여념이 없다.
귓전으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지세포에서는 봄이 오고 있었다.
■ 덧붙이기
·지세포성(知世浦城,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235-4번지) 지난 98년 경남도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된 지세포성은 조선 인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영남 6부의 2만5천명을 동원해 선창성을 쌓고 그 성 아래 수군 만호를 두어 진방하게 했다. 임진왜란 때 만호 강지욱(姜志昱)이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성을 함락당해 옥포성 밖으로 쫓겨났다가 1650년(효종 2) 다시 돌아왔는데 성 입구에 그때의 수군 만호 비석이 남아 있다.
지세포 앞 선창마을 뒤편에 있으며 현재 동쪽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전답의 축대나 가옥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이 있고 그 사이에 성루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성 안팎이 모두 전답과 임야 등으로 바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