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라인▽
'밥 세끼' 만으로 '사색'은 충분하다
거제 단비문학회 초청강연 노동자 시인 박영근
'결핍'의 또다른 이름은 '욕망'이다
작성 : 2004년 04월 28일(수) 10:49 가+가-
'노동자 시인' 박영근. 그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런 수식어를 좋아하는 시인이 과연 있을까만 그 역시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노동자 시인이라면 제일 먼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떠올린다. 80년대 그는 부조리한 현실에 맨몸으로 부딪히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노동자 시인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요즘에도 그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지, 노동을 생계로 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을 모두 뭉뚱그려 노동자 시인이라고 쉽게 명명해 버린다.
그의 시에서 그런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84년 첫시집의 제목이 '취업공고판 앞에서'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1년전,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를 출간, 지난 11월에는 권위있는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 시집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자본주의의 물결 앞에 볼품없는 한 인간이 맨손으로 일궈내야 하는 힘겨운 삶과 치욕스러움을 가까스로 견디는 그의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노동자 시인이라는 타이틀
현 시대의 노동자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노동자가 아닌 시인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박 시인을 보면 일말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생처럼 짧게 깎은 머리에, 검고 깊은 주름의 얼굴, 작은 키, 유행이 한참 지난 낡은 골덴 셔츠……. 이런 그의 외모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소 어눌한 말투와 숫기 없고 쓸쓸해 보이는 그의 눈빛 같은 것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요즘 시인이라면 대부분 대학을 나와 잘 나가는 경우엔 전업작가생활을 하거나 교수를,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그럴싸한 직장에서 근무하며 시를 쓰는 경우가 많다. 또 처음부터 국문과나 문예창작과에서 기본기를 다듬어서 비교적 쉽게 등단한 시인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고등학교 중퇴, 공장이나 건설 현장 등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며 살아온 박영근 시인의 전력을 알게 되면 ‘노동자시인’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결핍에 의한, 결핍을 위한 시쓰기
열댓명이 모인 작은 거제문화예술회관의 세미나실에는 ‘노동현장에서의 글쓰기와 현대문학이 나아갈 방향’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었고,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작은 체구의 그를 쳐다보는 눈빛들은 맑게 반짝거렸다.
한 시간여 시인의 강연이 끝나고 어느 참석자의 질문이 있었다. ‘바쁘고 피곤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시를 위한 사색과 공부를 하는가’하는 내용이었다.
시인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하루 밥 세끼 잘 먹는 것만으로도 사색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시를 위해 따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사치스럽고 인위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었을까.
밥 먹고, 걷고, TV를 보고, 사람을 만나는 그 속에서 순간순간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시의 그림자들을 만나게 된다. 시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집요하게 그 느낌의 실체를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인 언어로 표현해 감각의 충격으로까지 끌어올린다.
강연의 요지는 ‘결핍’이었다. 현대인들은 물질과 속도와 광기 속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성찰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심지어 요즘의 시인들도 그렇다.
그가 살아온 삶 자체가 결핍의 연속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결핍’의 다른 이름이 ‘욕망’이며 그것이 시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핍 혹은 타락(시인은 도덕주의자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을 생각해보면 타락의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시인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기억해 둘만 한 말이다. ‘웰빙’이라는 ‘건강’과 ‘고급’을 합친 또 다른 이름의 소비문화가 우리에게 사색과 명상생활을 어줍잖게 흉내내게 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가 주진 못할 것이다.
주류콤플렉스에 빠져 남의 흉내나 내고 자신의 진실한 삶은 정작 빠져 있는 껍데기같은 요즘 시들에서 그가 느끼는 씁쓸한 기분은 비단 현대인의 어리석은 삶을 바라보는 그것과 크게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김미령 기자 potzzi@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많이 본 뉴스

정치의회

자치행정

조선경제

문화예술

이슈/기획

우리동네

길따라칠백리

“웨딩의 꿈, 거제 지심도에서 이루세요”

경남도(도지사 박완수)는 ‘자연과 함께하는 웨딩·휴양섬’ 거제 지심도에서 리마인드 결혼식을 올리며 특별한 순…

  1. [구성옥의 산행일기] 느재고개
  2. 눈호강 입호강, 상춘객 사로잡을 거제 봄꽃 나들…
  3. [구성옥의 산행일기] 장기 바위

일상에서

[윤석봉 코너] “내 마음에 내가 속지 않는 것…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풍요로운 가을 문턱에 접어든 요즈음, 대한불교천태종 장흥사(주지 세운 스님)에서는 한 …

  1. [구성옥의 산행일기] 동틀 무렵
  2. [봄이 오는 길목] 까치집
  3. [산행일기] 숲 속의 벤치

기사 목록

모닝뉴스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