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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으로 돌아왔다
작성 : 2010년 10월 13일(수) 21:05 가+가-
“지난 12년을 침묵하는 동안에 단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12년 만에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펴낸 시인 박노해씨(53·박기평)는 13일 “시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1999년 ‘겨울이 꽃핀다’를 출간한 박씨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선언 직후 전쟁터로 날아가 평화활동을 시작했다. 최근까지 중동과 아프리카, 중남아메리카 등 세계 전역을 누볐다. 그러면서도 시 쓰기는 놓지 않았다. 무려 5000여편의 시를 육필로 직접 새겼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이 수많은 시들 중 304편만 골라서 엮은 것이다.

박씨는 “지난 12년 동안 내가 다녔던 곳은 폭음과 총성이 울리는 폐허 더미의 전쟁터였다”며 “흐느낌 속에서 미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 쓴 시가 키 높이를 넘는다”고 전했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혁명가이자 예언자라고 규정했다. “시인은 목에 칼날이 들어오고 가슴에 총알을 받아도 억압받는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절규할 수밖에 없다”며 “전 지구적으로 생태 위기와 전쟁이 넘치는 시대에 좋은 삶과 진보는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2년 만의 신작 시집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시집에 대해서는 “21세기의 세계사와 사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새천년 이후 인류사회의 몸부림이 절절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레바논 등 세계화의 모순지를 직접 두 발바닥으로 걸으면서 그 현장의 고통과 희망을 담았다”고 알렸다.

시집 제목은 책의 마지막에 실린 시에서 따왔다. “지금은 달릴수록 영혼이 증발하고 죽음의 냄새가 드리우는 저주받은 자유의 시대”라며 “하지만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시의 제목에는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버리지 마라,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간절한 기도이자 희망이 담겼다”며 “우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절규의 목소리”라고 밝혔다.

이번 시집의 편집자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들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5명과 30대 초반의 5명이 수개월 동안 토론하면서 5000편중 304편을 뽑았다”며 “신선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1980년대를 회고하고 486세대의 추락 등의 내용을 담은 박씨가 아끼는 100편의 시는 책에 실리지 못했다. “젊은 친구들이 이 시에 대해 절실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며 “머리는 움직이는데 정작 가슴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개인적으로는 처절하고 애착이 많이 갔지만 젊은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웃었다.

특히, 이번 시집은 “상처와 거짓이 가득한 시대에 아픈 시집이 될 것”이라며 “철저하게 외면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래도 “이 시집을 읽고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느낌은 받을 거라 확신한다.”

시인이라도 수년동안 이렇게 많은 시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쌓인 게 많아서 그렇다”면서 “내 시는 지구마을 민초들 말의 받아쓰기”라고 정의했다. 일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원한 알 자지라에서 아침에 만난 105살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며 “어제는 기다리던 첫 비를 보고, 오늘은 태양 같은 첫 얼굴을 보고. 먼 데서 온 아들아, 우리 집에 가서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샤이를 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달했다. 이처럼 “세계 민초들은 내게 많은 시를 들려준다.”

박씨는 “깊은 밤 책상 앞에 홀로 앉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쓰다보면 숨죽인 통곡처럼 펜 끝을 통해서 시가 흘러나온다”며 “지금도 계속 새로운 원고가 쌓이고 있다. 죽는 날까지 처절하게 시를 써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12년 동안 시집을 내지 않은 이유는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패한 혁명가로 책임을 져야했고 유명해진 이름마저 스스로 잊혀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억압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말해 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며 “이번 시집은 나로서는 12여년의 세월에 한 매듭을 짓는 셈”이라고 정리했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인간 해방에 대한 이념이 실종된 시대인데 새로운 총체 이념을 담은 책을 2014년께 펴낼 생각”이라며 “그래야 실패한 혁명가로서 마음의 빚을 다 갚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시를 포함해 전체적인 인상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는 평이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것 같다”는 답변이다. “과거 절대 폭압의 군사독재 시절이 ‘파(破)’를 통한 ‘입(立)’이 필요한 시대였다면 지금 시대에는 ‘입’을 통한 ‘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인권이 억눌려질 때는 그 억압의 실체를 깨뜨리는 것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삶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등 구체적인 생활 문화로부터 풀뿌리로 세워가는 사회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 시집의 내용도 내가 이미 살고 있는 삶의 모습 그대로이며 10여년 동안의 내 고백이기도 하다.”

박씨는 “봄과 가을이 짧아지는 등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며 “멸종동물 1호는 바로 시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야생 그대로의 천연기념물”이라는 것이다.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다.

한편, 박씨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사진전 ‘나 거기에 그들처럼’도 펼친다. 박씨가 찾아간 세계 곳곳의 가난과 분쟁의 모습을 오롯하게 담아낸 전시회다. 10여년간 찍은 사진 13만여장 중 120여점을 골라 선보인다.

박씨는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군사정부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부 가까이 판매되며 화제가 됐다. 7년여 수배 생활 끝에 1991년 체포,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옥중에 있던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1997년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수감 7년6개월 만인 1998년 8월1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2000년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nanum.com)를 설립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를 돌며 글로벌 평화나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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