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추억 속의 나의 고향 연초면
김영춘(거제자연의벗 거제에코투어 대표/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제4기 지역혁신가)
작성 : 2025년 11월 13일(목) 13:57 가+가-

김영춘 대표.
내가 태어난 고향은 연초면 다공리 중리 마을이다.
1980년 연초초등학교 4학년 가을에 나의 동네에는 당시 거제도에서 가장 좋은 2층 건물의 마을회관이 생겼다.
1층은 마을회관 2층은 창암도서관으로 이는 고향 출신의 창암 이창 회장님께서 자금을 기증하신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름 가치관을 가지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미래의 직업에 대하여 발표하는 시간에 친구들은 어떤 직업에 대해 말을 하였지만 나는 직업이 아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내 인생의 창암도서관
내 삶에서 나의 고향 동네에 창암도서관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다양한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현재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삶의 김영춘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창 회장님께서 명절연휴에 동네에 오시면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에 집에서 몇 번 뵙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의 당당한 풍채와 구레나룻 수염에 큰 키의 외모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이창 회장님은 장학사업도 많이 하셨고 고향을 위해 좋은 일들도 많이 하신 것으로 듣고 살았다.
몇 해 전 거제신문 독자위원으로 함께 활동한 하청면의 김백훈 선생님을 댁으로 모셔 드리면서 이창 회장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옛날 마을회관을 지을 당시에 마을회관은 동네에 짓고 도서관은 연초삼거리 인근에 지으면 어떻겠냐는 지역의 의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안 된다고 고향동네에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하셔서 그렇게 추진되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놀라움이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
만약 분리되어 추진되었다면 고향 동네와 거리가 있는 도서관 이용은 부실하였을 것이고 나의 가치관도 달라졌을 것이니 김백훈 선생님의 그런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백훈 선생님 덕분으로 이창 회장님과 잠깐이나마 통화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다행이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한 나는 늘 회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지니며 살아왔고, 세상에 도움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추억의 동네 냇가 연초천
아시다시피 나의 고향 동네에는 대금산 어느 발원지에서 흐른 물길이 흘러 흘러 MP다리를 지나 고현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고향 동네 위쪽에 연초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연초천 냇가의 수질은 1급수 깨끗한 물이었다. 댐이 생기면서 정수하는 과정에 생긴 슬러지를 그 시절에는 냇가로 곧장 배출하였고 냇가의 수질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의 하천은 심각한 수질오염을 겪었으나 하수처리 시설을 도입하며 도심의 하천은 깨끗한 하천으로 변해갔고, 반대로 깨끗한 시골의 하천은 오염되기 시작했다.
옛날 시골집은 집집마다 발생되는 하수는 수채구멍을 통해 밭으로 논으로 분산되었으나 벽돌집 콘크리트 집으로 새롭게 건축을 하는 과정에는 PVC 파이프를 통해 집에서 가까운 소하천으로 배출되며 동네의 고랑(소하천)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그런 소하천은 연초천 같은 지방하천으로 이어진다.
냇가에서 물놀이하고 물고기 잡든 그 어린 시절 나의 작은 바람은 내가 어른이 된 훗날에도 물놀이하고 물고기 잡는 깨끗한 하천을 바라였으나 지금은 꿈같은 현실이다.
현재 오염된 연초천에서 물고기를 잡는 이들은 더러 있어도 물놀이 수영을 하는 아이들과 어른은 아무도 없다. 불법소각 농업쓰레기 생활쓰레기 투기도 하천 곳곳에서 목격된다.
2025년 10월 현재 하루라도 빨리 연초댐 아래의 모든 동네에 하수처리 관로 작업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여 동네의 소하천과 연초천의 수질을 옛날처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은어가 돌아오고 더운 여름철에는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꿈꾼다.
나에게 은어는 고등학교 시절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에서 채변 봉투를 주었고 어느 날 분변 검사 발표를 하며 회충에 걸린 학생들은 번호 순서대로 앞으로 불려 나가 회충약을 받아먹는 시간이었다.
나의 번호는 건너서 마무리가 되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맨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나를 불렀다. 나는 보건소에 가서 약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그 시절 보건소는 현재 거제시공공청사가 있는 자리였다.
보건소에 가서 초록색 큰 알약 4개를 받으며 무슨 이유인지 물으니 의사 선생님께서 은어를 날로 먹은 적이 있냐고 물으셨다. 아, 동네 동생과 동네 고랑에서(중리천) 대나무 끝에 못을 달아 은어 한 마리를 잡았고 손질하여 된장에 찍어 먹은 순간이 기억났다.
은어를 날것으로 먹으면 걸리는 기생충이라 하였다.
나는 그 시절에(지금도) 민물고기는 거의 먹지를 않았는데 동네 동생과 은어를 잡아서는 뽐낸다고 먹은 것이 남녀합반 고등학교 1학년 봄에 채변 검사에서 기생충 약을 보건소까지 가서 받아먹어야 하는 추억을 준 은어이다.
명동 마을의 친구들도 연초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명동 냇가에서도 은어를 잡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나의 모교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
나는 20대 중반부터 거제의 환경단체 일을 도왔고 1998년~1999년 생태팀장으로 상근도 하였다.
1997년 말 상근 제안을 받고는 일주일쯤 고민을 하다가 상근을 선택했다.
그때 한 달 활동비(급여)는 65만 원이었다. 명절 두 번 휴가비 합쳐 50만 원, 1년 연봉이 830만 원이었다.
남자 친구들은 결혼을 시작하는 시기였고 1년 830만 원을 받으면서 결혼을 하겠다는 것은 맞지 않았기에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은 포기를 하고 상근직을 선택했다.
만 2년 생태팀장으로 상근을 하였고 2000년부터는 거제에코투어 일을 시작하였다.
이런저런 연유로 결혼은 조금 늦게 하였고 결혼을 하면서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초등학교 중학교는 모교인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결혼과 동시에 능포동 어느 아파트에 살았을 것이나 나의 아이들을 모교로 보낼 확고한 생각을 지녔기에 고향 동네 부모님 집에 얹혀살았다.
두 아들이 태어났고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현재 장남은 군 생활을 하고 있고,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나의 두 아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는 아버지인 나와 동문으로 이어져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인 어느 해 연초중학교 총동창회 임원단 회의가 문동저수지 옆 식당에서 있었다.
그때 나는 29회 동기회 부회장이었으나 회장이 참석을 못 하는 상황이라 부회장인 내가 참석을 하였다. 그 시절 29회는 총동창회에서는 거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기수였다.
총동창 회장님을 비롯하여 가장 큰 고민이 연초중학교 입학생이 갈수록 줄어 한 반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실정을 토로하며 걱정을 많이 하는 자리였다.
선배님들의 고민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 무렵에 손을 들고 내 소개를 하며 잠깐 발언을 하였다. 모교 입학생이 적어 그렇게 고민하시는 선배님들의 자제분들은 어느 초등학교 어느 중학교로 보내셨습니까.
저는 어린 아들이 둘 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는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함이 모교 사랑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발언을 하고 자리에 앉는 동안 선배님들의 짧은 침묵의 시간도 기억을 한다.
국가적으로는 지방소멸로, 거제시로는 면지역 소멸로 이어지는 중이다.
올해 3월 거제신문에서 연중장학회 이봉균 이사장님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입학생 모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기사였다.
우리 연초중학교는 깨어 있는 선배님들의 헌신으로 오래전 장학회가 만들어져 각 기수별로 분담금을 내며 연중장학회 이름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보다 더 적극적인 장학기금 운영과 모교 출신 동문들의 애교심으로 앞으로 최소한 동문들의 자제분들은 연초중학교로 입학을 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연초면 지역의 학부모 인구 감소로 입학생이 줄어 안타까운 현실이나 총동문의 똘똘 뭉치는 애교심으로 아이들이 다니고 싶은 연초중학교가 되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시길 희망한다.
이 글을 계기로 나는 연초면에 거제시에 우리나라에 더 도움이 되는 삶으로 살아가고자 다시금 마음을 잡아본다. 나의 모교 연초중학교여 영원하라.
❇이 글은 2025년 연초중학교 총동문 체육대회에 즈음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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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연초초등학교 4학년 가을에 나의 동네에는 당시 거제도에서 가장 좋은 2층 건물의 마을회관이 생겼다.
1층은 마을회관 2층은 창암도서관으로 이는 고향 출신의 창암 이창 회장님께서 자금을 기증하신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름 가치관을 가지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미래의 직업에 대하여 발표하는 시간에 친구들은 어떤 직업에 대해 말을 하였지만 나는 직업이 아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내 인생의 창암도서관
내 삶에서 나의 고향 동네에 창암도서관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다양한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현재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삶의 김영춘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창 회장님께서 명절연휴에 동네에 오시면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에 집에서 몇 번 뵙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의 당당한 풍채와 구레나룻 수염에 큰 키의 외모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이창 회장님은 장학사업도 많이 하셨고 고향을 위해 좋은 일들도 많이 하신 것으로 듣고 살았다.
몇 해 전 거제신문 독자위원으로 함께 활동한 하청면의 김백훈 선생님을 댁으로 모셔 드리면서 이창 회장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옛날 마을회관을 지을 당시에 마을회관은 동네에 짓고 도서관은 연초삼거리 인근에 지으면 어떻겠냐는 지역의 의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안 된다고 고향동네에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하셔서 그렇게 추진되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놀라움이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
만약 분리되어 추진되었다면 고향 동네와 거리가 있는 도서관 이용은 부실하였을 것이고 나의 가치관도 달라졌을 것이니 김백훈 선생님의 그런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백훈 선생님 덕분으로 이창 회장님과 잠깐이나마 통화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다행이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한 나는 늘 회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지니며 살아왔고, 세상에 도움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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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 회장 애향비. |
추억의 동네 냇가 연초천
아시다시피 나의 고향 동네에는 대금산 어느 발원지에서 흐른 물길이 흘러 흘러 MP다리를 지나 고현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고향 동네 위쪽에 연초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연초천 냇가의 수질은 1급수 깨끗한 물이었다. 댐이 생기면서 정수하는 과정에 생긴 슬러지를 그 시절에는 냇가로 곧장 배출하였고 냇가의 수질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의 하천은 심각한 수질오염을 겪었으나 하수처리 시설을 도입하며 도심의 하천은 깨끗한 하천으로 변해갔고, 반대로 깨끗한 시골의 하천은 오염되기 시작했다.
옛날 시골집은 집집마다 발생되는 하수는 수채구멍을 통해 밭으로 논으로 분산되었으나 벽돌집 콘크리트 집으로 새롭게 건축을 하는 과정에는 PVC 파이프를 통해 집에서 가까운 소하천으로 배출되며 동네의 고랑(소하천)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그런 소하천은 연초천 같은 지방하천으로 이어진다.
냇가에서 물놀이하고 물고기 잡든 그 어린 시절 나의 작은 바람은 내가 어른이 된 훗날에도 물놀이하고 물고기 잡는 깨끗한 하천을 바라였으나 지금은 꿈같은 현실이다.
현재 오염된 연초천에서 물고기를 잡는 이들은 더러 있어도 물놀이 수영을 하는 아이들과 어른은 아무도 없다. 불법소각 농업쓰레기 생활쓰레기 투기도 하천 곳곳에서 목격된다.
2025년 10월 현재 하루라도 빨리 연초댐 아래의 모든 동네에 하수처리 관로 작업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여 동네의 소하천과 연초천의 수질을 옛날처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은어가 돌아오고 더운 여름철에는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꿈꾼다.
나에게 은어는 고등학교 시절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에서 채변 봉투를 주었고 어느 날 분변 검사 발표를 하며 회충에 걸린 학생들은 번호 순서대로 앞으로 불려 나가 회충약을 받아먹는 시간이었다.
나의 번호는 건너서 마무리가 되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맨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나를 불렀다. 나는 보건소에 가서 약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그 시절 보건소는 현재 거제시공공청사가 있는 자리였다.
보건소에 가서 초록색 큰 알약 4개를 받으며 무슨 이유인지 물으니 의사 선생님께서 은어를 날로 먹은 적이 있냐고 물으셨다. 아, 동네 동생과 동네 고랑에서(중리천) 대나무 끝에 못을 달아 은어 한 마리를 잡았고 손질하여 된장에 찍어 먹은 순간이 기억났다.
은어를 날것으로 먹으면 걸리는 기생충이라 하였다.
나는 그 시절에(지금도) 민물고기는 거의 먹지를 않았는데 동네 동생과 은어를 잡아서는 뽐낸다고 먹은 것이 남녀합반 고등학교 1학년 봄에 채변 검사에서 기생충 약을 보건소까지 가서 받아먹어야 하는 추억을 준 은어이다.
명동 마을의 친구들도 연초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명동 냇가에서도 은어를 잡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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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어 |
나의 모교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
나는 20대 중반부터 거제의 환경단체 일을 도왔고 1998년~1999년 생태팀장으로 상근도 하였다.
1997년 말 상근 제안을 받고는 일주일쯤 고민을 하다가 상근을 선택했다.
그때 한 달 활동비(급여)는 65만 원이었다. 명절 두 번 휴가비 합쳐 50만 원, 1년 연봉이 830만 원이었다.
남자 친구들은 결혼을 시작하는 시기였고 1년 830만 원을 받으면서 결혼을 하겠다는 것은 맞지 않았기에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은 포기를 하고 상근직을 선택했다.
만 2년 생태팀장으로 상근을 하였고 2000년부터는 거제에코투어 일을 시작하였다.
이런저런 연유로 결혼은 조금 늦게 하였고 결혼을 하면서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초등학교 중학교는 모교인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결혼과 동시에 능포동 어느 아파트에 살았을 것이나 나의 아이들을 모교로 보낼 확고한 생각을 지녔기에 고향 동네 부모님 집에 얹혀살았다.
두 아들이 태어났고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현재 장남은 군 생활을 하고 있고,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나의 두 아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는 아버지인 나와 동문으로 이어져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인 어느 해 연초중학교 총동창회 임원단 회의가 문동저수지 옆 식당에서 있었다.
그때 나는 29회 동기회 부회장이었으나 회장이 참석을 못 하는 상황이라 부회장인 내가 참석을 하였다. 그 시절 29회는 총동창회에서는 거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기수였다.
총동창 회장님을 비롯하여 가장 큰 고민이 연초중학교 입학생이 갈수록 줄어 한 반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실정을 토로하며 걱정을 많이 하는 자리였다.
선배님들의 고민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 무렵에 손을 들고 내 소개를 하며 잠깐 발언을 하였다. 모교 입학생이 적어 그렇게 고민하시는 선배님들의 자제분들은 어느 초등학교 어느 중학교로 보내셨습니까.
저는 어린 아들이 둘 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는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함이 모교 사랑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발언을 하고 자리에 앉는 동안 선배님들의 짧은 침묵의 시간도 기억을 한다.
국가적으로는 지방소멸로, 거제시로는 면지역 소멸로 이어지는 중이다.
올해 3월 거제신문에서 연중장학회 이봉균 이사장님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입학생 모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기사였다.
우리 연초중학교는 깨어 있는 선배님들의 헌신으로 오래전 장학회가 만들어져 각 기수별로 분담금을 내며 연중장학회 이름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보다 더 적극적인 장학기금 운영과 모교 출신 동문들의 애교심으로 앞으로 최소한 동문들의 자제분들은 연초중학교로 입학을 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연초면 지역의 학부모 인구 감소로 입학생이 줄어 안타까운 현실이나 총동문의 똘똘 뭉치는 애교심으로 아이들이 다니고 싶은 연초중학교가 되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시길 희망한다.
이 글을 계기로 나는 연초면에 거제시에 우리나라에 더 도움이 되는 삶으로 살아가고자 다시금 마음을 잡아본다. 나의 모교 연초중학교여 영원하라.
❇이 글은 2025년 연초중학교 총동문 체육대회에 즈음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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