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용은 왜 삼성·한화 총수를 만나려 하나
만나면 성과, 만나지 않아도 명분…‘조선 호황과 거제 불황’의 간극 정조준
작성 : 2026년 09월 07일(월) 13:21 가+가-
변광용 거제시장이 삼성과 한화그룹 최고경영진에게 공식 면담을 요청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수석부회장이다.
거제에 양대 조선소를 둔 지방자치단체장이 그룹 총수를 공개적으로 만나겠다고 나선 것은 그 자체로 이례적이다. 면담 의제로 제시한 것도 설계인력의 부산 유출과 지역인재 채용, 정규직 일자리 확대, 기업과 지역의 상생 등이다.
문제는 이들 현안의 상당 부분이 그룹 총수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설계인력 배치와 채용은 각 조선소의 경영전략과 인력계획에 따라 결정된다. 지역사회 공헌과 지방정부와의 협력 역시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의 협의를 통해 다룰 수 있다.
그런데도 변 시장은 실무협의가 아닌 ‘총수 면담’을 선택했다.
왜 하필 총수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이번 행보의 핵심은 면담의 성사 여부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총수를 만나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다.
변 시장이 상대방으로 지목한 것은 삼성중공업이나 한화오션의 대표가 아니라 삼성과 한화라는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개별 조선소의 경영 판단을 넘어 그룹 차원의 결단과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 배경에는 조선업의 회복과 거제의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이 있다.
양대 조선소의 수주가 늘고 조선업이 되살아나고 있지만 거제의 인구와 청년층은 줄고 있다. 변 시장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올해 거제시 인구는 2400여 명, 청년인구는 2600여 명 감소했다.
조선업이 살아나는데 조선도시 거제는 왜 살아나지 않는가.
변 시장이 총수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특히 부산지역 설계센터 확대는 이 문제를 상징한다. 생산 현장은 거제에 남아 있는데 설계와 연구, 고급 일자리가 외부로 빠져나간다면 조선업 회복의 과실이 지역에 얼마나 축적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따라서 총수 면담 요구는 단순한 민원 제기라기보다 기업의 성장과 지역의 성장 사이에 생긴 간극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묻는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거제는 기업에 수혜를 주는가, 받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단순히 ‘기업이 지역에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구도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거제는 섬이다. 공간은 한정돼 있고 자체적인 산업·인구 자원도 풍부하지 않다. 조선산업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거제의 노동력과 산업 기반, 항만과 도시 인프라를 활용해 성장해왔다. 거제 역시 두 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와 경제적 효과에 크게 기대왔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수혜를 주는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제가 기업에 수혜를 베풀고 있는가. 아니면 거제가 기업으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가.
어쩌면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서로 무엇을 주고받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더 주고받을 수 있는가.
총수와의 면담을 진정한 협상으로 만들려면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도와달라’고 할 것인가, ‘함께 가자’고 할 것인가
거제시가 삼성과 한화의 최고경영진을 만나려 한다면 절박함만 호소해서는 부족하다.
거대 기업은 지방정부의 사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에도 기업의 계산이 있다. 필요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도시인지, 핵심인력이 정착할 수 있는 도시인지, 새로운 사업과 투자를 담아낼 공간과 인프라가 있는지, 기업의 미래 전략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따진다.
따라서 총수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논리는 ‘거제가 어렵다’는 호소가 아니라 ‘거제와 함께 가는 것이 기업에도 이익이다’라는 제안이어야 한다.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의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고, 연구와 설계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고, 주거·교육·교통·문화·의료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해 핵심인력이 떠나지 않는 도시를 만드는 구상이다.
더 나아가 기업의 새로운 투자와 산업전략이 거제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시의 공간과 기능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거제를 기업에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를 만들어 놓고 함께 투자하자고 해야 한다.
원석이 아무리 크다고 자랑해도 보석이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가치를 알아보느냐가 아니라, 그 원석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총수를 만나려는 지방정부라면 기업에 ‘가공을 맡길 원석’을 내놓아야 한다.
기업상생기금에서 총수 면담까지
변 시장의 이번 행보가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는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를 상대로 기업상생기금 출연 등을 요구해왔다. 조선업 위기 당시 정부와 지방정부가 산업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역할을 했다면, 조선업이 회복된 뒤에는 기업 역시 지역사회와 성과를 나눠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에는 요구의 무대가 달라졌다.
기업상생기금이 기업의 지역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총수 면담은 일자리와 인력, 기업 기능의 지역 잔류라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겨냥한다.
결국 메시지는 하나로 모인다.
조선소가 거제에서 성장한다면 그 성장의 일부가 거제의 일자리와 인구, 지역경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요구 자체는 충분히 타당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업이 거제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방정부가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왜 공개적으로 총수를 부르는가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면담 요청을 조용히 진행하지 않고 언론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와의 협의를 통해 지역 현안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룹 총수와의 공식 면담이 실제로 성사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수 현안을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 차원에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개 요청은 면담 자체만을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총수 면담 요구에는 두 가지 효과가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기업을 향한 압박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을 향한 메시지다.
“시장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직접 나서고 있다.”
지역 현안을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정치적 신호이기도 하다.
특히 설계인력의 부산 확대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반발이 커진 상황에서 이 의제는 정치적으로도 선명하다. 조선업 호황이라는 긍정적 지표 뒤에 가려진 인구 유출과 일자리의 질, 지역경제의 침체를 다시 전면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까치발’의 경제학
여기서 ‘까치발’이라는 비유가 등장한다.
키가 작은 아이가 까치발을 들면 실제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상대와 눈높이를 맞출 수는 있다.
지방정부와 거대 기업 사이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기업의 인사와 투자, 조직 배치에 대해 지방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한은 제한적이다. 특히 글로벌 경쟁을 벌이는 대기업에게 지역의 요구만으로 경영 판단을 바꾸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방정부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여론, 정치적 명분, 지역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도시가 가진 미래의 가치다.
총수를 직접 만나겠다는 공개적인 행위는 제한된 제도적 권한을 정치적 영향력과 상징적 권위로 보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외교는 시작될 수 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굴욕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협상력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상대의 힘을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는 것이 외교다.
문제는 까치발을 든 다음이다.
까치발은 눈높이를 맞추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다.
정치적 퍼포먼스와 외교력의 경계
그래서 총수 면담 요구를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총수와의 만남 자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경계는 의외로 간단하다.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거제의 절박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 뒤, 기업과 거제가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느냐다.
그것이 있다면 총수 면담은 외교다.
반대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거나 ‘큰 사람과 만나는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면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까워진다.
총수의 어깨에 올라가 자신을 크게 보이려는 것과, 자신의 도시를 크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만나면 성과, 만나지 않아도 명분
이번 행보에는 정치적으로 묘한 역설도 있다.
총수가 만나주면 변 시장에게 정치적 성과가 된다. 만나주지 않아도 명분이 남는다.
면담이 성사되면 시장은 거제의 현안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성과를 내세울 수 있다.
반대로 면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지역의 절박한 요구에 기업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면담 요청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만남은 성과가 아니다. 결과가 성과다.
총수가 거제를 방문하고 시장과 악수한다고 해서 설계인력이 돌아오는 것도, 청년이 거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신규 정규직 채용은 기업의 사업 전망과 인력수급 계획에 따라 결정되고, 설계·연구 기능의 지역 잔류 역시 기업의 전략적 판단이다.
총수 면담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가
결국 진짜 승부는 면담 이후다.
거제시는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지와 함께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
양대 조선소와 정기적인 협의체를 만들고, 설계·연구인력의 지역 잔류를 위한 정주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지역인재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울 교육·훈련 체계를 만들고, 기업의 투자와 도시계획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제의 비전이다.
조선소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조선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와 기술, 생활환경을 갖춘 도시. 조선산업의 변화가 오더라도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담아낼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비전이 있어야 기업과의 관계도 ‘도와달라’에서 ‘함께하자’로 바뀔 수 있다.
조선 호황인데 거제는 왜 어려운가
결국 이번 변 시장의 행보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총수 면담의 성사 여부가 아니다.
조선업은 살아나는데 왜 조선도시 거제의 청년은 떠나는가.
이 질문에는 기업만 답할 수도 없고 지방정부만 답할 수도 없다.
기업은 지역에서 얻은 성장의 과실을 지역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답해야 한다. 지방정부 역시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에 앞서 기업이 계속 투자하고 머물고 싶은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답해야 한다.
변 시장이 총수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제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지금의 절박함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 절박함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삼성과 한화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거제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갖춰졌다면 총수 면담은 충분히 외교적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거대한 기업의 어깨에 올라타려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까치발을 든다고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높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높아지는 것이다.
변광용 시장의 ‘총수 면담’ 카드가 정치적 퍼포먼스에 그칠지, 아니면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새롭게 설계하는 협상의 출발점이 될지는 결국 면담 이후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까치발을 들지 말고, 작은 거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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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에 양대 조선소를 둔 지방자치단체장이 그룹 총수를 공개적으로 만나겠다고 나선 것은 그 자체로 이례적이다. 면담 의제로 제시한 것도 설계인력의 부산 유출과 지역인재 채용, 정규직 일자리 확대, 기업과 지역의 상생 등이다.
문제는 이들 현안의 상당 부분이 그룹 총수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설계인력 배치와 채용은 각 조선소의 경영전략과 인력계획에 따라 결정된다. 지역사회 공헌과 지방정부와의 협력 역시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의 협의를 통해 다룰 수 있다.
그런데도 변 시장은 실무협의가 아닌 ‘총수 면담’을 선택했다.
왜 하필 총수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이번 행보의 핵심은 면담의 성사 여부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총수를 만나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다.
변 시장이 상대방으로 지목한 것은 삼성중공업이나 한화오션의 대표가 아니라 삼성과 한화라는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개별 조선소의 경영 판단을 넘어 그룹 차원의 결단과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 배경에는 조선업의 회복과 거제의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이 있다.
양대 조선소의 수주가 늘고 조선업이 되살아나고 있지만 거제의 인구와 청년층은 줄고 있다. 변 시장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올해 거제시 인구는 2400여 명, 청년인구는 2600여 명 감소했다.
조선업이 살아나는데 조선도시 거제는 왜 살아나지 않는가.
변 시장이 총수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특히 부산지역 설계센터 확대는 이 문제를 상징한다. 생산 현장은 거제에 남아 있는데 설계와 연구, 고급 일자리가 외부로 빠져나간다면 조선업 회복의 과실이 지역에 얼마나 축적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따라서 총수 면담 요구는 단순한 민원 제기라기보다 기업의 성장과 지역의 성장 사이에 생긴 간극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묻는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거제는 기업에 수혜를 주는가, 받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단순히 ‘기업이 지역에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구도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거제는 섬이다. 공간은 한정돼 있고 자체적인 산업·인구 자원도 풍부하지 않다. 조선산업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거제의 노동력과 산업 기반, 항만과 도시 인프라를 활용해 성장해왔다. 거제 역시 두 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와 경제적 효과에 크게 기대왔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수혜를 주는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제가 기업에 수혜를 베풀고 있는가. 아니면 거제가 기업으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가.
어쩌면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서로 무엇을 주고받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더 주고받을 수 있는가.
총수와의 면담을 진정한 협상으로 만들려면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도와달라’고 할 것인가, ‘함께 가자’고 할 것인가
거제시가 삼성과 한화의 최고경영진을 만나려 한다면 절박함만 호소해서는 부족하다.
거대 기업은 지방정부의 사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에도 기업의 계산이 있다. 필요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도시인지, 핵심인력이 정착할 수 있는 도시인지, 새로운 사업과 투자를 담아낼 공간과 인프라가 있는지, 기업의 미래 전략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따진다.
따라서 총수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논리는 ‘거제가 어렵다’는 호소가 아니라 ‘거제와 함께 가는 것이 기업에도 이익이다’라는 제안이어야 한다.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의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고, 연구와 설계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고, 주거·교육·교통·문화·의료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해 핵심인력이 떠나지 않는 도시를 만드는 구상이다.
더 나아가 기업의 새로운 투자와 산업전략이 거제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시의 공간과 기능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거제를 기업에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를 만들어 놓고 함께 투자하자고 해야 한다.
원석이 아무리 크다고 자랑해도 보석이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가치를 알아보느냐가 아니라, 그 원석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총수를 만나려는 지방정부라면 기업에 ‘가공을 맡길 원석’을 내놓아야 한다.
기업상생기금에서 총수 면담까지
변 시장의 이번 행보가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는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를 상대로 기업상생기금 출연 등을 요구해왔다. 조선업 위기 당시 정부와 지방정부가 산업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역할을 했다면, 조선업이 회복된 뒤에는 기업 역시 지역사회와 성과를 나눠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에는 요구의 무대가 달라졌다.
기업상생기금이 기업의 지역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총수 면담은 일자리와 인력, 기업 기능의 지역 잔류라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겨냥한다.
결국 메시지는 하나로 모인다.
조선소가 거제에서 성장한다면 그 성장의 일부가 거제의 일자리와 인구, 지역경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요구 자체는 충분히 타당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업이 거제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방정부가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왜 공개적으로 총수를 부르는가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면담 요청을 조용히 진행하지 않고 언론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와의 협의를 통해 지역 현안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룹 총수와의 공식 면담이 실제로 성사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수 현안을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 차원에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개 요청은 면담 자체만을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총수 면담 요구에는 두 가지 효과가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기업을 향한 압박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을 향한 메시지다.
“시장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직접 나서고 있다.”
지역 현안을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정치적 신호이기도 하다.
특히 설계인력의 부산 확대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반발이 커진 상황에서 이 의제는 정치적으로도 선명하다. 조선업 호황이라는 긍정적 지표 뒤에 가려진 인구 유출과 일자리의 질, 지역경제의 침체를 다시 전면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까치발’의 경제학
여기서 ‘까치발’이라는 비유가 등장한다.
키가 작은 아이가 까치발을 들면 실제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상대와 눈높이를 맞출 수는 있다.
지방정부와 거대 기업 사이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기업의 인사와 투자, 조직 배치에 대해 지방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한은 제한적이다. 특히 글로벌 경쟁을 벌이는 대기업에게 지역의 요구만으로 경영 판단을 바꾸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방정부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여론, 정치적 명분, 지역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도시가 가진 미래의 가치다.
총수를 직접 만나겠다는 공개적인 행위는 제한된 제도적 권한을 정치적 영향력과 상징적 권위로 보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외교는 시작될 수 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굴욕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협상력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상대의 힘을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는 것이 외교다.
문제는 까치발을 든 다음이다.
까치발은 눈높이를 맞추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다.
정치적 퍼포먼스와 외교력의 경계
그래서 총수 면담 요구를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총수와의 만남 자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경계는 의외로 간단하다.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거제의 절박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 뒤, 기업과 거제가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느냐다.
그것이 있다면 총수 면담은 외교다.
반대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거나 ‘큰 사람과 만나는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면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까워진다.
총수의 어깨에 올라가 자신을 크게 보이려는 것과, 자신의 도시를 크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만나면 성과, 만나지 않아도 명분
이번 행보에는 정치적으로 묘한 역설도 있다.
총수가 만나주면 변 시장에게 정치적 성과가 된다. 만나주지 않아도 명분이 남는다.
면담이 성사되면 시장은 거제의 현안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성과를 내세울 수 있다.
반대로 면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지역의 절박한 요구에 기업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면담 요청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만남은 성과가 아니다. 결과가 성과다.
총수가 거제를 방문하고 시장과 악수한다고 해서 설계인력이 돌아오는 것도, 청년이 거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신규 정규직 채용은 기업의 사업 전망과 인력수급 계획에 따라 결정되고, 설계·연구 기능의 지역 잔류 역시 기업의 전략적 판단이다.
총수 면담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가
결국 진짜 승부는 면담 이후다.
거제시는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지와 함께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
양대 조선소와 정기적인 협의체를 만들고, 설계·연구인력의 지역 잔류를 위한 정주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지역인재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울 교육·훈련 체계를 만들고, 기업의 투자와 도시계획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제의 비전이다.
조선소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조선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와 기술, 생활환경을 갖춘 도시. 조선산업의 변화가 오더라도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담아낼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비전이 있어야 기업과의 관계도 ‘도와달라’에서 ‘함께하자’로 바뀔 수 있다.
조선 호황인데 거제는 왜 어려운가
결국 이번 변 시장의 행보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총수 면담의 성사 여부가 아니다.
조선업은 살아나는데 왜 조선도시 거제의 청년은 떠나는가.
이 질문에는 기업만 답할 수도 없고 지방정부만 답할 수도 없다.
기업은 지역에서 얻은 성장의 과실을 지역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답해야 한다. 지방정부 역시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에 앞서 기업이 계속 투자하고 머물고 싶은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답해야 한다.
변 시장이 총수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제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지금의 절박함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 절박함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삼성과 한화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거제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갖춰졌다면 총수 면담은 충분히 외교적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거대한 기업의 어깨에 올라타려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까치발을 든다고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높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높아지는 것이다.
변광용 시장의 ‘총수 면담’ 카드가 정치적 퍼포먼스에 그칠지, 아니면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새롭게 설계하는 협상의 출발점이 될지는 결국 면담 이후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까치발을 들지 말고, 작은 거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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