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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
한국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
작성 : 2004년 01월 22일(목) 00:00 가+가-
김수영이 거제도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월께였다. 산과 들에서는 눈이 내리자마자 녹아내리고 남향의 산자락에는 여기저기 키 작은 야생화들이 피었다. 1월이라고 해도 겨울을 느낄수 없었다. 포로들은 군용지로 수용된 논밭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았다. 40인용 천막이었는데 80명 이상이 수용됐다. 그런 천막이 산아래 평원에는 새까맣게 들어섰다.
당시 거제도에는 원래 살고 있던 주민이 약 11만8천여명, 한국전쟁 뒤로 서울과 북한 등지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10만여명, 미8군 제2병참사령부 관리하의 포로들이 13만2천명쯤 되었다. 포로수용소 소장은 미군 장교였고 중요직책도 미군들이 담당했으며 경비만 한국군 경비대가 맡았다.
수용소가 자리한 곳은 처음에는 바다와 푸른 산이 어울려 거제도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으나, 포로들의 천막과 시멘트 건물들이 들어서고 수용인원이 늘어가자 돈버짐이 핀 아이들의 머리와 같이 흉한 몰골로 변해갔다. 더욱이 천막안에는 인민군 출신의 포로들과 김수영의 경우같이 강제로 의용군에 붙잡힌 이질집단이 섞여 있어서, 한동안의 정착기간이 지나자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군은 처음 이같은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15일 간격으로 포로들의 막사배치를 이동했으나 그것도 여의롭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프락치를 집어넣을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었다.
경비대와 짜거나 경비대의 눈을 피해 막사를 탈출하는 포로들도 있었고, 부산의 친지들에게 연락해 비공식적으로 철조망을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유정도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남도 북도 아닌 일본을 선택한 것은 남도 북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을 기만하고 대전으로 피난간 정부,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존경하는 동포 여러분!'하고 말하는 그런 정부를 그는 따를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남에 화포를 겨누고 내려오는 김일성도 믿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피난 수도 부산은 사람들로 홍수를 이뤄 먹을것도, 입을것도 없다는 소문이 수용소 안에는 자자했다. 그에 비하면 수용소는 먹을 것도 충분했고 입을 것도 걱정없었다. 수용소는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이었다.
5월이 되자 수용소는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9호 막사안에 소위 조선노동당 거제지부란 것이 조직되고, '용광로'라 이름한 '해방동맹'이 각 막사에 생겨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 친공포로들은 각 동에 적기를 올리고 노동가를 부르며 막사 안을 행진했다. 반공포로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도 반공청년단을 결성해 대한민국 군가를 부르며 막사를 돌아다녔다. 한밤에 린치가 행해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친공 반공으로 포로들이 양분돼 극한투쟁을 전개하자 미군 당국은 포로들을 이념별로 재배치했는데, 그 재배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역할한 것이 한국군 통역과 경비대들이었다. 그들은 반공포로들을 돕기위해 하루종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74동과 81동, 82동, 83동이 반공포로 진지가 되었고 62동이 친공포로 진지로 나누어 졌다.
밤이면 양 진영은 적대 막사의 철조망을 부수고 습격했다. 하루에 15명의 포로들이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처형돼 시체가 토막토막 잘려지는가 하면 미군측이 15일 간격으로 실시하던 성향선별심사를 거부함에 따라 미군에 의해 친공포로 77명이 사살되고 1백40명이 부상당한 대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매일 타살자가 생겨나고 자살자도 나타났다.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소장 돗드준장을 납치해 세계적인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에 지나지 않는 면이 있다. 습격과 린치와 난자 살인은 더 극심했고, 이같은 사건은 5월 이전부터 발생했던 듯하다. 김수영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라는 시를 보면,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 갔는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뛰어들어갔는가'는 습격을 의미하고 충돌을 뜻한다. 그리고 충돌은 1951년 3월 16일, 시간은 오전 5시이다. 3월의 오전 5시는 새벽 어둠이 아직 풀리기 전이다. 김수영은 새벽의 미명 속에서 제61수용소와 제62수용소 포로들이 돌을 던지며 싸우는 것을 보고 있다. 그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이 시기에 대한 진술은 아니지만, 포로수용소의 철조망에 대해 '삼동유감(三冬有感)'이라는 산문에서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여편네와 어린놈을 데리고 영화 '25시'를 구경하기도 했다. '25시'를 보고 나서 포로수용소를 유유히 걸어나와서 철조망 앞에서 탄원서를 들고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가슴이 선뜩해졌다. 아아, 나는 작가의 사명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타락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때의 '사명의 망각'과 '타락'과 '마비'는 자신의 포로수용소 시절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이후의 자신의 문학적 행동에 대한 반성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김수영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포로수용소를 유유히 걸어나오면서 철조망 앞에서 탄원서를 들고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를 쓸 때의 그의 눈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명멸했을 것이고, 장용학의 단편소설 '요한시집'이 생각났을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테마로 하고 있는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누에'라는 시인 기질 사나이의 두 눈을 손에 들고 동쪽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벌을 친공포로들에게 받는다. 누에의 두 눈은 친공포로들이 뽑은 것이다. 친공포로들은 노래한다.
"뽕뽕 뽕잎이 떨어진다. 뽕뽕 뽕잎이 떨어진다."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두 눈이 뽑힌 '누에'의 죽음보다도 더 비극적인 경험을 수두룩하게 했으며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에 의해 인간이 짐승보다 더러운 존재로 타락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막사의 포로 시체가 토막쳐 변소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고서도 이데올로기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 시에도 썼듯이 '유자철망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꿈'을 꾸기도 했다.

김수영의 시 세계와 생애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이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초기 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난해한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4·19를 경험하면서 그의 시는 자유의 이념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적인 비애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김수영의 시대는 혼란과 궁핍과 억압의 시대였다. 그는 식민지의 땅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 혼란을 겪었고,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들며 6·25를 겪었다. 4·19를 통해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려 했지만, 5·16 이후 다시 시작된 정치적 억압은 자유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그의 싸움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을 궁핍과 방황과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문학적 투지로 자신의 문학공간을 넓혀 나갔다.
김수영의 시가 그 이후의 한국현대시에 미친 가장 결정적인 기여의 하나는 시와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가 나날의 일상적 생활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쓰여진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 생각은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을 거절하고 기존의 서정시의 관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감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김수영은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설움과 절망, 그리고 자유의 꿈을 노래했으며, 이러한 시인 의식이 새로운 시형식을 열게 만들었다.
1968년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시와 그의 문학적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김수영에 의해서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지금도 낯선 문학적 모험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준열한 정신의 척도로 남아 있다.


윤광룡 기자 yong8128@chollian.net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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