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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그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나는 자주 사람의 숲에서 도피해서 산에서 '기진'하고 싶다
작성 : 2004년 03월 03일(수) 00:00 가+가-

노자산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후략- "
-정지용의 백록담 부분


오랜만에 산을 올랐더니 얼마 못 가 기진했다. 자연휴양림 입구의 고로쇠나무 밑둥에 매달린 기다란 비닐봉지를 본 지 불과 20여분 후다. 항상 처음 30분 안 쪽이 고비다.
하지만 곧 도착한 대피소에서 사과 한 알을 허겁지겁 베어먹고 나서는 호흡이 안정되고 길도 편했다. 마늘바위를 왼쪽 어깨쯤에 두고 지나기까지는 제법 경사길이었고 그 후는 무난한 코스로 기억될 1시간 20분 가량의 노자산 등산이었다.
노자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도해<사진/유호현>

바람소리에 쫓겨 내려왔다. 2월말이지만 기대했던 쑥과 냉이는 구경도 못하고 푸른 것이라곤 겨우 삭정이와 낙엽들 사이로 이쑤시게처럼 삐죽삐죽 내민 잡풀들만 볼 수 있었다.
활엽수들은 성긴 싸리빗자루처럼 서 있고 솔가지 사이사이로 촘촘히 빠져나오는 휘파람소리가 스산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전만 해도 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더니 이내 먹구름이 나무 우듬지를 짓뭉겔 듯 내려앉고 있었다. 카메라를 준비했지만 별 소득도 없이 도망치듯 내려왔다.
정지용의 시에서 「백록담」은 「장수산」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시중 하나다. 불과 해발 565m의 노자산을 오르며 이 시의 묘미를 느끼기는 부족하지만 산을 오르면 생각나는 시다.
산이 주는 고독, 기분 좋은 피로를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나는 자주 사람의 숲에서 도피해서 산에서 '기진'하고 싶다.
『현대시학』 2월호를 읽다가 김춘수가 정지용의 「백록담」에서 이미지즘의 강한 영향을 읽었음을 지적한 내용이 있었다. 김춘수의 시는 상징주의에서 무의미시로 발전했지만 중간에 이미지즘이 강한 시들을 쓰기도 했다.
이쯤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게 있어 짚고 넘어 가야겠다. 거제에 산지 불과 1년 반이지만 그후로 줄곧 느꼈던 것인데, 청마에 비해 김춘수에 대한 대접이 너무 박하다는 것이다. 유치환은 그의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할만큼 이 지역을 대표하는 큰 시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반면, 충무 출신이면서 통영중학 교사로 근무한 바 있는 김춘수 시인은 그달리 언급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 김춘수

물론, 김춘수는 아직 생존해 있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단에서의 평가로 보면 청마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 계시지 않을까 싶다.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김춘수는 그의 대표작 「꽃을 위한 서시」나 「꽃」외에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애송시가 별로 없다. 후기로 갈수록 그의 시는 어렵다. 그의 독자적인 영역인 '무의미시'에 가면 나로서는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해할 것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의미는 상실되고 이미지의 연쇄만이 이 단어에서 저 단어로 널뛰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걱정하기에는 너무 이를 지도 모른다. 몇 십년 후에는 김춘수 생가나 김춘수 문학관이 틀림없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생가가 지금쯤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염려되는 바가 없진 않다. 3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아가신 그 유명한 서정주도 생가도 사라질뻔한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는데….
생가나 시비, 문학관 등이 의미나 중요도에 관계없이 난립되거나 훼손되고 있는 요즘이다.
문학은 어디가고 무수한 입들과 권력과 논리만이 그 자리를 메울 때가 많다. 현대시인도 사정이 이러한데 오래 전 것은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진정한 시인 뿐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진정한 애독자들이 아쉬운 시대이다.
김미령 기자 potzzi@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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