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라도 확인했으면 좋으련만”
납북자 가족모임 납북어민 사진 공개
오대양호 61, 62호 선원 단체촬영 모습
오대양호 61, 62호 선원 단체촬영 모습
작성 : 2005년 02월 03일(목) 11:09 가+가-

“정부가 나서 생사라도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납북자 가족모임(대표 정성룡)이 최근 납북어민들의 사진을 입수 공개했다. 최 대표가 중국에서 활동 중인 탈북자 지원단체에서 입수한 이 사진에는 1970년대 초 납치된 오대양 61, 62호와 휘영 37호 선원 37명이 사찰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별다른 표정 없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위에 ‘1974년 묘향산 휴양기념’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점으로 미뤄 피랍 2, 3년 뒤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납북된 남편과 아버지의 지켜보는 가슴은 아프기만 하다. “언론이 납북자 문제를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것도 못 마땅하다”
장목면 농소마을은 80여가구 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어촌마을이다. 납북자 모임의 최 대표는 납북자 가족들이 이번 설날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이야기꽃이나마 피울수 있도록 사진을 여러장 복사해 우송해 줄 계획이라고 하지만 사진이 이들에게 또다른 아픔으로 다가서고 있다.
지난 72년 12월 28일 부산선적 오대양 61호 62호(약 1백톤급) 쌍끌이 저인망 어선 두 척은 서해로 홍어잡이를 나섰다가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월선을 알아챈 뒤 급히 돌아오다 북한군에 발견돼 피납됐으며 이 사건으로 장목면 농소마을은 11가구가 무더기 생이별을 했다.
오대양호 사건
부산선적 오대양 61호 62호(약 1백톤급) 쌍끌이 저인망 어선 두 척이 납북된 것은 지난 72년 12월 28일. 서해로 홍어잡이를 나섰던 이 배는 홍어떼를 쫓다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월선을 알아챈 뒤 급히 돌아오다 북한군에 발견돼 피납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그냥 파도에 휩쓸려 난파된 줄 알았다고 한다. 납북된 오대양호에 마을 청·장년 12명이나 포함됐던 건 이 배(오대양 61호)의 선장이 농소마을 주민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이 배의 선장은 박순성(당시 54)씨로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 같은 연(緣)을 토대로 마을 주민들이 대거 이 배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배가 납북되기 얼마 전 박씨는 이 배의 선장직을 그만뒀고, 선주(부산)는 선장 없는 배라고 무작정 놀릴 수가 없어, 당시 갑판장으로 일하던 이 마을 출신 유모씨에게 책임을 맡겨 홍어잡이에 출어시켰다고 한다.
이정도씨는 당시 '바다 박사'로 통하던 선장 박씨가 승선했더라면, 이 배는 결코 월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도 아쉬워했다. 항해경험 부족이 항로를 벗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대양호 납북 이후 졸지에 처자식을 잃어버린 농소마을 11가구의 삶은 너무도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 오대양호가 납북도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납북자 가족들은 엉뚱한 오해(?)까지 받아가며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중삼중의 힘든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납북자 가족모임(대표 정성룡)이 최근 납북어민들의 사진을 입수 공개했다. 최 대표가 중국에서 활동 중인 탈북자 지원단체에서 입수한 이 사진에는 1970년대 초 납치된 오대양 61, 62호와 휘영 37호 선원 37명이 사찰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별다른 표정 없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위에 ‘1974년 묘향산 휴양기념’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점으로 미뤄 피랍 2, 3년 뒤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납북된 남편과 아버지의 지켜보는 가슴은 아프기만 하다. “언론이 납북자 문제를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것도 못 마땅하다”
장목면 농소마을은 80여가구 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어촌마을이다. 납북자 모임의 최 대표는 납북자 가족들이 이번 설날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이야기꽃이나마 피울수 있도록 사진을 여러장 복사해 우송해 줄 계획이라고 하지만 사진이 이들에게 또다른 아픔으로 다가서고 있다.
지난 72년 12월 28일 부산선적 오대양 61호 62호(약 1백톤급) 쌍끌이 저인망 어선 두 척은 서해로 홍어잡이를 나섰다가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월선을 알아챈 뒤 급히 돌아오다 북한군에 발견돼 피납됐으며 이 사건으로 장목면 농소마을은 11가구가 무더기 생이별을 했다.
오대양호 사건
부산선적 오대양 61호 62호(약 1백톤급) 쌍끌이 저인망 어선 두 척이 납북된 것은 지난 72년 12월 28일. 서해로 홍어잡이를 나섰던 이 배는 홍어떼를 쫓다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월선을 알아챈 뒤 급히 돌아오다 북한군에 발견돼 피납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그냥 파도에 휩쓸려 난파된 줄 알았다고 한다. 납북된 오대양호에 마을 청·장년 12명이나 포함됐던 건 이 배(오대양 61호)의 선장이 농소마을 주민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이 배의 선장은 박순성(당시 54)씨로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 같은 연(緣)을 토대로 마을 주민들이 대거 이 배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배가 납북되기 얼마 전 박씨는 이 배의 선장직을 그만뒀고, 선주(부산)는 선장 없는 배라고 무작정 놀릴 수가 없어, 당시 갑판장으로 일하던 이 마을 출신 유모씨에게 책임을 맡겨 홍어잡이에 출어시켰다고 한다.
이정도씨는 당시 '바다 박사'로 통하던 선장 박씨가 승선했더라면, 이 배는 결코 월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도 아쉬워했다. 항해경험 부족이 항로를 벗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대양호 납북 이후 졸지에 처자식을 잃어버린 농소마을 11가구의 삶은 너무도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 오대양호가 납북도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납북자 가족들은 엉뚱한 오해(?)까지 받아가며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중삼중의 힘든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