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채 끌려가야 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지금이라도 찾고 싶다
작성 : 2005년 02월 03일(목) 11:44 가+가-
장목면에 사는 김현기(83) 할아버지는 젊은시절을 일제에 의해 징집됐다.
21세인 42년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을때 ‘조선총독부 국민총동원령 26조’ 에 의해 징집된 김할아버지는 일정기간의 훈련을 마친뒤 만주 758부대 경리부에 배속됐다.
회사원으로 일하다 군속으로 동원된 김 할아버지는 어떻게 모은 돈인데 억울해서라도 당시 저금했던 1천23원을 찾고 싶다고 했다.
사등 덕호가 고향인 이종기(70)할아버지는 일본 나고야 비행장에서 1년동안 징용을 당했다. 거제면 동상 하혁기 할아버지는 “월급받아 쓸때가 없으니 현지 부대에 예금했고 돌아올때 통장만 가지고 왔다” “중국에 위안소가 있었는데 일본장교는 일본여성이 일반사병은 한국여성이 일했다” 고 말했다.
노무자, 군인및 군속, 일본군성피해여성 등 일제때 강제동원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신고및 진상조사 신청 접수가 시작된 1일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회장 전기호) 사무실과 전국 시·도 및 시·군·구 민원실에는 기막힌 사연들 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거제시에만 3일 현재 30명이 넘어서 경남도내에서 가장 많이 접수했으며 총무과 시정계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홍씨(당시 21세)는 42년 아내와 배속에 아이를 둔채로 징용 당했다. 현재 거제시에서 접수된 피해자 가운데 고졸로 가장 고학력이다. 대구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에 근무하던 김씨는 45년 뉴기니아 전투에서 사망했다.
김씨의 사연은 유복자로 태어난 딸이 군복입은 사진 등 자료를 근거삼아 신고했다.
김모(76·사등면)씨는 1943년 강제동원돼 일본 야마구치현 가부시키 조선소에서 철판작업을 하다 오른쪽 다리를 다쳐 장애3급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장승포항에서 50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으며 45년 12월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면직원과 이장이 대상자를 보고하면 강제로 징집당했다고 말했다. 서두태씨(80.둔덕면)는 “면서기와 군인들에게 징집됐는데 굴파기 자갈파기 등으로 받은 돈은 하루에 5원이었다” 고 말했다.
거제시에 신고된 내용중에는 일본군에 징집당해 통영군청에 모여있는데 갑작스런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당시 40대 가장의 안타까운 죽음도 접수됐다.
거제시 관계자는 “역사적인 진실을 제대로 밝혀 피해자와 유족에게 조금이나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21세인 42년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을때 ‘조선총독부 국민총동원령 26조’ 에 의해 징집된 김할아버지는 일정기간의 훈련을 마친뒤 만주 758부대 경리부에 배속됐다.
회사원으로 일하다 군속으로 동원된 김 할아버지는 어떻게 모은 돈인데 억울해서라도 당시 저금했던 1천23원을 찾고 싶다고 했다.
사등 덕호가 고향인 이종기(70)할아버지는 일본 나고야 비행장에서 1년동안 징용을 당했다. 거제면 동상 하혁기 할아버지는 “월급받아 쓸때가 없으니 현지 부대에 예금했고 돌아올때 통장만 가지고 왔다” “중국에 위안소가 있었는데 일본장교는 일본여성이 일반사병은 한국여성이 일했다” 고 말했다.
노무자, 군인및 군속, 일본군성피해여성 등 일제때 강제동원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신고및 진상조사 신청 접수가 시작된 1일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회장 전기호) 사무실과 전국 시·도 및 시·군·구 민원실에는 기막힌 사연들 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거제시에만 3일 현재 30명이 넘어서 경남도내에서 가장 많이 접수했으며 총무과 시정계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홍씨(당시 21세)는 42년 아내와 배속에 아이를 둔채로 징용 당했다. 현재 거제시에서 접수된 피해자 가운데 고졸로 가장 고학력이다. 대구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에 근무하던 김씨는 45년 뉴기니아 전투에서 사망했다.
김씨의 사연은 유복자로 태어난 딸이 군복입은 사진 등 자료를 근거삼아 신고했다.
김모(76·사등면)씨는 1943년 강제동원돼 일본 야마구치현 가부시키 조선소에서 철판작업을 하다 오른쪽 다리를 다쳐 장애3급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장승포항에서 50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으며 45년 12월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면직원과 이장이 대상자를 보고하면 강제로 징집당했다고 말했다. 서두태씨(80.둔덕면)는 “면서기와 군인들에게 징집됐는데 굴파기 자갈파기 등으로 받은 돈은 하루에 5원이었다” 고 말했다.
거제시에 신고된 내용중에는 일본군에 징집당해 통영군청에 모여있는데 갑작스런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당시 40대 가장의 안타까운 죽음도 접수됐다.
거제시 관계자는 “역사적인 진실을 제대로 밝혀 피해자와 유족에게 조금이나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