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가 안겨준 조영남의 예술인생
거제문화예술회관 오는 10일 유화 전
작성 : 2005년 03월 04일(금) 16:31 가+가-

조영남 유화전이 오는 10일 거제문화예술회관 미술관에서 시작된다
거제문화예술회관 미술관에서 조영남의 예술인생을 만날 수 있게됐다.
거제시 문화예술재단은 오는 10일부터 내달 3일까지 25일동안 조영남의 유화작품 40여점을 전시한다. 특히 전시회 첫날인 오후 2시 회관 소극장에서 조영남씨가 직접 강사로 나서 자신의 ‘노래와 인생’을 소개한다
지난 1973년 김민기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조영남의 첫 개인전 이래로 30년 간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작가 조영남은 가수로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얼마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잡지에서 여론 조사 결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리스트에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의 뒤를 이어 7위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화가로서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다.
2003년 5월 이후 서울과 과천 부산 광주 울산 마산 인천등지에서 개인전이 연속적으로 있었고 2004년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미술행사인 2004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초청되었으며 미국의 뉴욕, 워싱턴, LA등지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꾸준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조영남의 작품은 크게 태극기, 혹은 분단된 조국을 시각화 한 깃발 시리즈 주제로 한 작품과 한국적 pop 형태의 화투연작 그리고 30여년 전의 서울의 모습과 작가가 자란 고향 마을 등이 있으나 그 외에도 평면과 입제 꼴라쥬 작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태극기를 주제로 한 최근의 작품들은 지난 “2002 월드컵경기” 에서 보여진 우리민족의 단합과 힘과 열정을 담은 작품으로 오랫동안 엄숙주의에 의해 금기시 되어왔던 태극기라는 국가적 상징에 대한 자유롭고 회화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지만 70년대부터 깃발 연작을 통해 분단된 조국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화투 연작 역시 너무 통속적이어서 예술의 소재로는 금기 시 되어온 화투를 pop적으로 풀어 표현해 내고 있다. (jebiwool.org/cyber museu/조영남, 대한민국 태극기전 참조)
3월 거제 예술회관의 전시를 통해서 가수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묵묵히 작업을 해온 한 작가의 예술적 삶을 진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선입견으로는 가수면 가수 화가면 화가로서의 재능과 활동만 염두에 두고 또 다른 활동은 여기나 외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가볍지 않은 재능과 활동을 보여주는 다재다능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며 현대 사회는 그렇게 multyfle한 능력을 갖추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영남은 국제적으로는 가수 보다는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간의 해외 전시를 통해 오히려 국내보다 밖으로부터 작업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수로서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한 화가가 아니라 가수로서의 명성에 가려진, 30년 이상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온 화가 조영남과 그의 탁월한 작품세계를 거제시민들이 만날 수 있게 됐다.
전문가가 보는 조영남
69년에 제작된 작품과 72년, 73년에 제작된 몇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조영남은 가수가 되지 않았더라면 화가 조영남으로 남아 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작성한 연보를 참작해보면, <69년은 김웅, 최욱경, 박대인 등과 어울려 미술의 기쁨을 나눔, 우연히 발견한 니콜라 드 스탈의 서정추상에 극도로 매료됨>으로 나와 있다.
그가 한창 가수로서 인기를 획득해 나가고 있을 무렵, 다른 한편에서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의 가수로서 생애와 화가로서의 생애는 어쩌면 비슷한 시기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음악은 밖으로 드러나는 수단으로 진행시킨 반면, 그림은 혼자만의 작업으로 추수려 온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가 조영남을 보면 참 재능이 특출한 사람이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물론 이점은 가수로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경력난을 보면,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한 적이 없다. 고1때 교지 제작에 삽화 전문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과, 고3때 미술부장을 역임했다는 것이 미술과 관계되는 기록일 뿐 이후는 별다른 미술 수업을 받은 흔적이 없다. 음악은 정식 음악대학을 다녔으니까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미술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어느 한쪽의 기량이 승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쪽은 위축되는 것이 통상인데, 그의 경우는 두 개의 영역에서 다같이 뛰어난 역량을 나타내 보이고 있어 타고난 예인이라는 감탄을 절로 하게 한다. 여기서 예인이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타고난 재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음악과 미술에 다같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조영남이 본격적인 그림제작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체류 시기인 1970년대 중반이 된다. 이 시기에 그의 연보에는 <향수달래기 겸, 취미겸, 유화에 손을 댐, "고상한 취미를 극대화시킴이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다."라는 구호아래 본업이어야 할 음악이나 신학보다 훨씬 강도 높은 열정으로 미술작업에 고군분투.> (1976)로 나와 있다.
이때 그리고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는 일련의 태극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나오다가 곧이어 바둑판 시리즈와 화면에 소쿠리, 노뜬과 같은 입체적인 오브제를 꼴라쥬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체적인 꼴라쥬 작업은 최근 일련의 설치물로 자연스레 발전되어져 그의 작업의 진폭은 평면에서 공간 설치물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의 내역이나 추진의 과정이 단순한 아마츄어의 입장이나 취미의 영역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 자신이 푸념하고 있듯 가수가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차원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조영남의 화면은 강한 구성적 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가 처음 니꼴라 드 스탈을 발견하고 심취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거나 뿔리아코프, 로드코 등의 작가를 좋아했다는 대목을 참작해보면 이점은 쉽게 납득이 간다. 두텁게 안료를 발라올리면서 동시에 건축적인 구성을 시도해나가는 니콜라 드 스탈의 서정적 표현추상은 조영남의 구성적 패턴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어진다. 니콜라 드 스탈에 심취도었다는 것은, 스탈을 좋아할 수 있는 공감대가 이미 내면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인데, 균형감각과 탄탄한 가구적(架構的)구성인지는 아마도 그의 부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임이 분명한 것 같다(아버지, 큰아버지가 대목).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구성을 시도해 나가는 발전의 추이에서도 이 같은 유전적인 일면을 떠올리게 한다. 화톳장을 꼴라쥬하거나 태극기를 그리거나 바둑알을 꼴라쥬하거나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평면회화에서 공통되는 것은 일류전(Illusion)의 탈피다. 언제나 직접적 현실로 되돌아와 있다. 홧통장, 태극기, 바둑알은 그 자체로 이미 현실적 물체이다. 그려지는 것이라기 보다 직접의 현실을 화면에 끌여들인 것이다. 이점에서 조영남의 그림은 처음부터 오브제성이 강한 회화로 특징된다. 옛가옥의 나무문틀과 놋요강을 결합시킨 최근 일련의 오브제 작품이나 깡통을 펴서 용접으로 형태화시켜나간 로봇인간(번쩍 번쩍 빛나는 금단 추가 달린 학생제복을 입고 싶어 전전했다는 중학시절을 회상하고 만든)까지 역시 한결같이 강한 입체성의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이와같은 일상적 물질의 원용을 팝(Pop)적인 문맥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그가 미국적인 팝에 어느 정도 빠진지는 알 길 없으나, 그런 영향관계보다는 일류전을 제거하고 보다 직접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그의 강한 현실감각(문화적 측면에서)에 더 깊은 요인이 있지 않나 보인다. 이런 현실감각은 그의 일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꾸미지 않은 소박한 태도로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치기만만하다고나 할까. 누구의 눈치를 보는것도, 자신의 작품이 어떤 반응를 보일지 개의지 않는 태도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중속에, 현실속에서 숨쉬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술을 더욱 강하게 하는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미술평론가)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거제시 문화예술재단은 오는 10일부터 내달 3일까지 25일동안 조영남의 유화작품 40여점을 전시한다. 특히 전시회 첫날인 오후 2시 회관 소극장에서 조영남씨가 직접 강사로 나서 자신의 ‘노래와 인생’을 소개한다
지난 1973년 김민기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조영남의 첫 개인전 이래로 30년 간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작가 조영남은 가수로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얼마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잡지에서 여론 조사 결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리스트에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의 뒤를 이어 7위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화가로서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다.
2003년 5월 이후 서울과 과천 부산 광주 울산 마산 인천등지에서 개인전이 연속적으로 있었고 2004년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미술행사인 2004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초청되었으며 미국의 뉴욕, 워싱턴, LA등지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꾸준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조영남의 작품은 크게 태극기, 혹은 분단된 조국을 시각화 한 깃발 시리즈 주제로 한 작품과 한국적 pop 형태의 화투연작 그리고 30여년 전의 서울의 모습과 작가가 자란 고향 마을 등이 있으나 그 외에도 평면과 입제 꼴라쥬 작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태극기를 주제로 한 최근의 작품들은 지난 “2002 월드컵경기” 에서 보여진 우리민족의 단합과 힘과 열정을 담은 작품으로 오랫동안 엄숙주의에 의해 금기시 되어왔던 태극기라는 국가적 상징에 대한 자유롭고 회화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지만 70년대부터 깃발 연작을 통해 분단된 조국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화투 연작 역시 너무 통속적이어서 예술의 소재로는 금기 시 되어온 화투를 pop적으로 풀어 표현해 내고 있다. (jebiwool.org/cyber museu/조영남, 대한민국 태극기전 참조)
3월 거제 예술회관의 전시를 통해서 가수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묵묵히 작업을 해온 한 작가의 예술적 삶을 진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선입견으로는 가수면 가수 화가면 화가로서의 재능과 활동만 염두에 두고 또 다른 활동은 여기나 외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가볍지 않은 재능과 활동을 보여주는 다재다능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며 현대 사회는 그렇게 multyfle한 능력을 갖추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영남은 국제적으로는 가수 보다는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간의 해외 전시를 통해 오히려 국내보다 밖으로부터 작업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수로서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한 화가가 아니라 가수로서의 명성에 가려진, 30년 이상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온 화가 조영남과 그의 탁월한 작품세계를 거제시민들이 만날 수 있게 됐다.
전문가가 보는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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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남의 작품 |
그가 한창 가수로서 인기를 획득해 나가고 있을 무렵, 다른 한편에서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의 가수로서 생애와 화가로서의 생애는 어쩌면 비슷한 시기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음악은 밖으로 드러나는 수단으로 진행시킨 반면, 그림은 혼자만의 작업으로 추수려 온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가 조영남을 보면 참 재능이 특출한 사람이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물론 이점은 가수로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경력난을 보면,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한 적이 없다. 고1때 교지 제작에 삽화 전문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과, 고3때 미술부장을 역임했다는 것이 미술과 관계되는 기록일 뿐 이후는 별다른 미술 수업을 받은 흔적이 없다. 음악은 정식 음악대학을 다녔으니까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미술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어느 한쪽의 기량이 승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쪽은 위축되는 것이 통상인데, 그의 경우는 두 개의 영역에서 다같이 뛰어난 역량을 나타내 보이고 있어 타고난 예인이라는 감탄을 절로 하게 한다. 여기서 예인이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타고난 재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음악과 미술에 다같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조영남이 본격적인 그림제작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체류 시기인 1970년대 중반이 된다. 이 시기에 그의 연보에는 <향수달래기 겸, 취미겸, 유화에 손을 댐, "고상한 취미를 극대화시킴이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다."라는 구호아래 본업이어야 할 음악이나 신학보다 훨씬 강도 높은 열정으로 미술작업에 고군분투.> (1976)로 나와 있다.
이때 그리고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는 일련의 태극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나오다가 곧이어 바둑판 시리즈와 화면에 소쿠리, 노뜬과 같은 입체적인 오브제를 꼴라쥬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체적인 꼴라쥬 작업은 최근 일련의 설치물로 자연스레 발전되어져 그의 작업의 진폭은 평면에서 공간 설치물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의 내역이나 추진의 과정이 단순한 아마츄어의 입장이나 취미의 영역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 자신이 푸념하고 있듯 가수가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차원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조영남의 화면은 강한 구성적 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가 처음 니꼴라 드 스탈을 발견하고 심취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거나 뿔리아코프, 로드코 등의 작가를 좋아했다는 대목을 참작해보면 이점은 쉽게 납득이 간다. 두텁게 안료를 발라올리면서 동시에 건축적인 구성을 시도해나가는 니콜라 드 스탈의 서정적 표현추상은 조영남의 구성적 패턴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어진다. 니콜라 드 스탈에 심취도었다는 것은, 스탈을 좋아할 수 있는 공감대가 이미 내면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인데, 균형감각과 탄탄한 가구적(架構的)구성인지는 아마도 그의 부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임이 분명한 것 같다(아버지, 큰아버지가 대목).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구성을 시도해 나가는 발전의 추이에서도 이 같은 유전적인 일면을 떠올리게 한다. 화톳장을 꼴라쥬하거나 태극기를 그리거나 바둑알을 꼴라쥬하거나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평면회화에서 공통되는 것은 일류전(Illusion)의 탈피다. 언제나 직접적 현실로 되돌아와 있다. 홧통장, 태극기, 바둑알은 그 자체로 이미 현실적 물체이다. 그려지는 것이라기 보다 직접의 현실을 화면에 끌여들인 것이다. 이점에서 조영남의 그림은 처음부터 오브제성이 강한 회화로 특징된다. 옛가옥의 나무문틀과 놋요강을 결합시킨 최근 일련의 오브제 작품이나 깡통을 펴서 용접으로 형태화시켜나간 로봇인간(번쩍 번쩍 빛나는 금단 추가 달린 학생제복을 입고 싶어 전전했다는 중학시절을 회상하고 만든)까지 역시 한결같이 강한 입체성의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이와같은 일상적 물질의 원용을 팝(Pop)적인 문맥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그가 미국적인 팝에 어느 정도 빠진지는 알 길 없으나, 그런 영향관계보다는 일류전을 제거하고 보다 직접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그의 강한 현실감각(문화적 측면에서)에 더 깊은 요인이 있지 않나 보인다. 이런 현실감각은 그의 일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꾸미지 않은 소박한 태도로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치기만만하다고나 할까. 누구의 눈치를 보는것도, 자신의 작품이 어떤 반응를 보일지 개의지 않는 태도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중속에, 현실속에서 숨쉬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술을 더욱 강하게 하는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