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의 편린을 음미하며(2)
길따라 칠백리 내고향 둔덕
거제시 허가과장 서용태
거제시 허가과장 서용태
작성 : 2004년 11월 14일(일) 09:49 가+가-

절골마을 야생화 식물원에서 바라본 산방산
청마선생 출생지 논란 무의미한 일
면 소재지가 되고 있는 하둔마을 어귀에는 청마 유치환선생 고향시비동산이 있고 그 앞으로 근래에 관광보도교가 새로 설치되어 청마교라고 명명한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바로 방조제 뚝과 청마고향시비동산을 연결하는 명물이 된다.
바로 옆에는 둔덕면 복지회관과 둔덕면청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복지회관 한 켠에는 청마선생께서 생전에 고이 간직하신 유품 200여점을 임시전시 하고 있어 둔덕면사무소를 찾아가면 직원들이 안내도 해주고 전시실을 개방하여 주기도 한다.
청마고향시비 동산과 복지회관을 사이에 두고 노인들의 체력단련장인 게이트볼장이 있는데 그 게이트볼장 자투리 땅에 고 박순석 공의 송덕비가 건립되어 작은 공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박공의 송덕비 앞에선 특히 ,하둔, 방답,어구의 50대이상 되는 분들은 숙연한 마음과 함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 송덕비의 주인공인 박공이 바로 청마선생의 외조부가 되시니 동랑 유치진 선생과 청마선생의 어머니가 되시는 박우수 여사의 친정이 바로 둔덕 하둔이라는 방증이 되기 때문에 청마선생의 출생지 논란에 대하여는 둔덕사람들은 무의미 한일로 일축해버린다.
길 손이 박공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청마선생의 외조부가 되어서 그런게 아니다.
2000년 어느 봄날에 박공의 송덕비 제막식이 있던 날 당시 면장을 지낸 필자는 축사에서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우리 둔덕사람, 특히, 하둔, 방답 , 어구사람들은 3대에 걸쳐 이 분의 은공을 입고 살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던 그 해로 말하면 우리나라 전역이 거의 같은 수준이었겠지만, 춘궁기란게 있었고, 전기나 자동차 같은 문명의 이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하천은 생긴 그대로 흐르고 어김없이 그 하천 마다 맨발로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아슬아슬하게 물길을 건너서 학교 가고, 장보러 가고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둔덕에서 당대의 부농이었던 박공은 춘궁기에 어려운 사람에게 식량과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내주기도하여 이웃을 돌보며 살았다고 하며 둔덕천과 마을소하천을 가로질러 사비를 들여 3개소의 나무다리를 가설하여 주민들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둔덕천의 그 나무 다리가 노후하여 폭우에 유실되자 또 다시 외지에서 대형 석물 20여개를 운반하여 둔덕천에 징검다리를 설치하였는데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급류에 떠내려 가고 파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 1995년도에 재직한 김화순 둔덕면장이 (현 시청 지역경제과장) 둔덕천하구에 파묻힌 징검다리 잔해 일부를 찾아내어 현재 송덕비 앞에 전시해 두고 있다.
고향에는 추억이 있다
둔덕천하면 참 추억이 많은 곳이다. 우리가 어릴 적 둔덕천은 수심이 깊어 5미터정도의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해도 끝이 닿지 않아 여름철 물놀이 장소가 되었고 봄이면 사백어(일명 뱅아리)가 떼를 지어 올라오고, 은 빛 은어가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여름철이 되면 금빛 은어로 변하면 그야말로 둔덕천은 물반 은어 반이었다. 이 은어를 잡아 된장을 속에 넣고 맛있게 먹어본 사람들은 평생 둔덕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하천수를 끌어들여 둔덕사람들의 상수도 원수로 쓰는 관계로 수원이 많이 줄어들어 옛날 그 모습은 찾을 길이 없으나 둔덕에도 곧 광역상수도가 들어온다고 하니 옛날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하천으로 복원되지 않을까, 아무튼 기대가 크다.
또한 둔덕천은 수질이 일급수에 해당되어 의종의 수라상에 진상하였다는 파래(일명 감탕)은 초봄 둔덕사람들의 식탁을 장식한 중요한 반찬거리이다.
이 감탕은 깨끗한 민물과 바닷물이 교수되는 하천하구에서만 자라는 생물이다. 둔덕에 오면 이 감탕을 드셔보시라, 그러면 둔덕의 맛을 다보고 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즈음 청마교 너머에는 왕새우 양식장이 생겨 새우를 사서 즉석 구이 해먹으며 소주 한 잔 곁들이는 맛과 멋도 함께 즐겨 봄직한 곳이다.
고향이 둔덕사람이 아닐지라도 청마교를 건너 1500미터의 방조제 뚝길을 걸어 서편방조제에서 낙조를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에 면사무소 앞 해안길가에 핀 해당화를 감상해보라 그리고 청마의 유품과 작품을 감상 할 기회를 가져보라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재지 마을 맞은 편에 방답마을과 어구 마을이 있는데 간척지 방조제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다와 맞닿은 갯촌이었다. 그러기에 임진왜란 이후에 왜구침입에 대비하여 방답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 광진산업자리가 되는 곳이 쇠널이라는 지명을 갖고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구마을을 진입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방답을 통과해야 한다. 그 방답마을과 어구마을 경계에 위치하는 곳이 쇠널이다.
어구의 본명이 외인금이라 아마 임진왜란 이후에 이곳에서 병기를 제작한곳으로써 외인출입금지구역이 되었고 그 외인 출입금지팻말을 쇠널판지에 새겨 세웠으니 쇠널이라는 지명을 낳게한 한 것으로 짐작된다.
드러나는 역사의 현장
다음 날 나그네는 깊은 감회 속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하둔마을을 지나 하둔과 농막마을의 경계지점에 이르면 여관곡과 자주방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바로 의종이 세금을 현물 수납하던 기관이 있었으니 여관이라 하고 여기에 병사가 검문하고 근무하였기로 자주권을 행사한 곳이라 자주방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농막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곳 지명도 현민이 먹을 식량과 군량미를 생산하기 위한 농영 시설을 농막이라 한데서 유래하였으며, 폐왕성 옆의 뒷산에 안치봉이라는 낮으막한 산을 이곳 사람들은 의종의 대비를 안치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실제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의종을 따라 이곳 까지 온 사실이 없었고 의종의 후궁 한사람인 무비가 의종을 따라 온 기록으로 볼 때 일반 주민들이 후궁을 태후로 잘못 알고 이렇게 불렀지 않나 싶다. 또한, 여관곡 앞의 너른 들을 장들이라고 하는데 대비에게 바칠 농사를 짓는 들이라는 뜻으로 장들이라 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것이다.
농막마을 뒤편에는 망골 또는 망터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의종의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는 망대가 있었기로 그 터를 망터 그 골을 망골이라 부르고 있어 의종이 유배 온 임금이 아니라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후사를 도모할 계책을 세운 곳이 바로 둔덕기성(폐왕성)이 아니었을까 ,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림마을을 접어들면 고군현치소의 유허지를 만나게 되는데 의종이 이 곳에 머물기 훨씬 이전인 고려성종2년 서기983년에 거제현을 기성현으로 개칭하여 거제의 치소지인 관아가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비운의 왕 의종과 폐왕성
고군현치소를 지나 거림저수지 옆 산길을 걸어 폐왕성으로 향하면 나그네의 발길은 가시밭길을 걸어오던 의종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게 된다.
우두봉 기슭에 자리 잡은 폐왕성에서 서쪽 육지를 바라보면 견내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적을 감시하고 방어하기에 최적지란 생각이 드는 산성임을 알게 된다. 성의 둘레는 550미터가 되고, 성 높이는 제일 높은 곳이 8미터 정도 된다.
최근 거제시에서 성곽을 100여 미터 정도 복원하고 일부 시굴조사를 마친 상태에서 밝혀진 역사적 사실은 서기 1170년에 의종이 거제도 둔덕 땅으로 유배 와서 쌓은 성이 아니라 신라 시대에 축조하여 허물어져 있던 성을 의종의 유배에 대비하여 급히 보수하여 사용한 성곽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근래에 와서 폐왕성 양사방으로 임도가 개설 되어 신거제대교와 연결되고 사등오량, 둔덕면 상서 마을과도 연결된다.
폐왕성 아래 돌무더기 (덜겅)가 넓게 퍼져있는데 이 곳 둔덕사람들은 이 덜겅을 대단히 신성시 하고 있다. 이 바위덩어리 밑으로 사시사철 청아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바위는 사람들의 건강을 좋게 하는 효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설 속의 천태산 마고할멈이 의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도술로써 성을 쌓고 남은 돌무더기가 바로 마고덩걸이라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거림마을 다음 마을이 마장이다. 의종때에 우두봉 산 자락 평평한 곳에서 군마를 길럿다는 마장터가 있으니 거림위의 마을이름이 그 대로 마장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폐왕성에서 유래된 지명중에 마하터란 곳이 있다. 임금을 알현하고자 하는 자는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와야 하는 지점으로 마하, 또는 하마터라고 불려지고 있다. 둔덕면사무소에 가면 둔덕지형을 축소모형 ( 미니어쳐) 으로 표시되어 있어 미리보고 답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방하마을과 산방마을로 향하는 나그네의 발길은 한결 가벼워 진다.
둔덕천 중상류 지점을 가로지르는 방산교를 건너면 우람한 팽나무 하나가 길손을 맞이한다. 이 팽나무 아래에서 어린시절 형인 동랑이 어린 동생 청마와 함께 해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으리라. 4백년은 될 법한 이 팽나무 밑뿌리 부분은 승천을 앞둔 용의 발톱같이 힘차 보인다.
동랑.청마선생의 생가를 보며
그 바로 앞에 동랑.청마선생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말끔히 복원되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청마기념관 건립부지가 이미 마련 머지않아 청마선생의 작품세계를 여기에서 한 눈에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생가 아릿 채 작은 방에서 동랑.청마가 태어나 동랑이 5섯살 때 청마가 3살 때 한의사였던 부친 유준수가 가솔을 거느리고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이 곳을 떠나 통영에 살게 된 것이다. 법정문제로 까지 비하된 청마의 출생지 시비를 놓고 보면 어이가 없다.
거제도 둔덕골이라는 청마 자작시의 싯귀처럼, “8대로 내려 내조부의 살으신 곳”은 바로 고향이 된다. 청마가 태어난 시대에 같이 살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출생지를 증명한단 말인가. 오로지 그 유족들의 뜻을 존중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무튼 청마선생의 무덤은 둔덕 방하리 선영에 이장되어 묻혀 있다, 어머님을 먼저 보내면서 어머님 곁에 묻히겠다는 청마가 적은 사모비 마지막 구절은 일찍이 써 놓은 유언과도 같아 양산 백운동 공원묘지에서 이곳으로 이장하게 된 연유를 알 것 같다.
“멀지 않아 제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이 하늘 우러르고 묻힐 날을 기약하오며 죽어 설을 이 목숨이 저윽이나 마음편안 하옵내다. 길이 고이 잠드시옵소서. 아들 청마 유치환 “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청마선생의 묘소를 향해 고불고불 산길을 가야한다. 가는 길목에 방하리에만 존재하는 고려무덤을 보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면적이 훼손되고 축소되었지만 일부의 무덤흔적이 아무도 돌보지 않아 숲속에 버려져 있다.
고려무덤은 왜 생겨났을까? 의종이 둔덕 땅을 밟을 때 의종을 따라온 문무백관과 호위군은 폐왕성 주변의 거림,농막, 마장, 방하 등지에서 살게 되었다. 의종이 둔덕땅에 온지 3년째가 되는 1173년에 의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의종은 이 의민에 의하여 경주(당시 계림)에서 시해되었고, 이제나 저제나 임금따라 개성으로 가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은 모든 꿈이 좌절된채 1196년 명종 26년에 이의민이 삼족참형 될 때까지 27년간을 둔덕 땅에서 살게 되었으니, 바로 그 들의 공동묘지가 지금의 고려무덤인 것이다.
그리고, 청마생가 200여미터 뒷 편에는 공주샘이라는 조그만 샘터가 지금도 존재하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의종의 공주가 물이 좋은 이 곳 샘터에서 물을 자주 길어 갔다고하여 공주샘이 되었다한다. 청마선생의 무덤을 향하는 작은 도로는 매우 한적 하다.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길 손의 발자국 소리 모두가 자연의 소리로 귓가에서 감흥을 일으킨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꼭 가야 할 길이지만 청마선생은 죽어서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참배하고 있으며 합장한 부모님과 그 옆으로 부인과 나란히 고향땅에 묻혀 있으니 말이다.
청마선생 묘소 앞에서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면서 서둘러 산방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청마생가 앞 팽나무를 지나 산방산으로 향했다. 신봉승 조선왕조 5백년 작가가 둔덕을 방문 후 강연장에서 산방산은 필봉이라, 청마선생 같은 당대의 걸출한 문인이 탄생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거제 5대명산 중 하나 산방산
산방산의 높이는 507.2미터로 소백산 줄기를 이어받은 거제 5대 명산중의 하나이다. 멋진 산은 사방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람하고 잘생긴 산이어야 한다 했는데 거제 5대 명산중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산은 산방산 밖에 없다.
산방산은 갖가지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심령스런 산이다.
기우제를 지낸 3일 후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무제터가 있고 무제터 위에는 매를 닮았다 하여 매바위가 있다. 또한 20여평 되는 부처굴이 있는데 일명 삼신굴이라고도 하며 삼존석불이 있었으나 해방 후 등산객의 증가로 석가모니불의 머리부분이 훼손되었고,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의 돌부처는 도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방산 정상부분에서 조금만 아래로 향하면 오색무지터가 나오는데 영롱한 오색의 무지개 색깔이 나오는 신비스런 땅이 있다. 이 곳에 무덤을 만들면 그 집안은 부귀영화가 따르나 둔덕땅 전체는 가뭄이 든다하여 옛날부터 둔덕사람들은 혹심한 가뭄이 들면 이 곳 땅에 묻힌 유골이 있는지 살폈다고 한다.
산방산에는 옥굴이라는 굴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원종 12년 서기 1271년에 왜구의 침범이 극심하여 나라에서 거제현민 전체를 거창의 가조현으로 소개시킨 일이 있는데 고향땅을 떠나기 싫어한 옥씨 일가가 이 동굴에서 1392년 조선 창건 때 까지 숨어 살았다고 하여 옥굴이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산방산에는 박달나무 군락지가 있어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여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이하자 온 백성이 뜻을 모아 몽고군을 불력으로서 몰아내기 위하여 현재 합천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는데 그 경판제작에 사용된 목재가 바로 산방산에서 가져간 박달나무였으니 참으로 심령스런 산이 아닐 수 없다.
정상에서 바라다본 산자락은 그야말로 만산홍엽이다. 옥동마을 쪽으로 타고 흐르는 단풍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산 길에 절골마을 야생화 식물원에 들렀다.
절골마을 야생화 식물원
산방산 입구 절골마을 마루터기에 산간지 버려진 논을 일구어 8년 전부터 17,000여평의 대단위 민간투자 야생화 식물원이 조성되고 있다. 100여종 3만여그루의 식물이 철따라 꽃을 피우는 이곳은 무릉도원 같은 곳이다.
서울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고향 땅에서 명품을 남기겠다는 일념하나로 고향을 찾아온 유일한 민간투자 사업가이시다. 식물원을 조성한지 8년 만에 거의 마무리 하고 막바지 오픈 준비에 한창이다.
그 주인공 되시는 분이 바로 이 곳 산방마을 에서 출생한 거제중앙신문 김덕훈 회장이다. 식물원 관리자로부터 향긋한 차 한잔을 대접받고 나오는데 어느새 땅거미가 식물원을 덮고 있었다.
식물원 오솔길에 핀 구절초 무리에 넋을 잃고 서서 오늘 하루의 모든 여독이 봄눈녹듯 풀림을 느낀다. 1박 2일간의 둔덕고향 기행을 통하여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이 작은 고을 둔덕 땅에서 일어난 아기자기한 수 많은 역사의 편린을 주어담고, 음미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나그네의 감회를 무엇으로 형언하랴.
모닝뉴스 기자 webmaster@morningnews.or.kr 기사 더보기
면 소재지가 되고 있는 하둔마을 어귀에는 청마 유치환선생 고향시비동산이 있고 그 앞으로 근래에 관광보도교가 새로 설치되어 청마교라고 명명한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바로 방조제 뚝과 청마고향시비동산을 연결하는 명물이 된다.
바로 옆에는 둔덕면 복지회관과 둔덕면청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복지회관 한 켠에는 청마선생께서 생전에 고이 간직하신 유품 200여점을 임시전시 하고 있어 둔덕면사무소를 찾아가면 직원들이 안내도 해주고 전시실을 개방하여 주기도 한다.
청마고향시비 동산과 복지회관을 사이에 두고 노인들의 체력단련장인 게이트볼장이 있는데 그 게이트볼장 자투리 땅에 고 박순석 공의 송덕비가 건립되어 작은 공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박공의 송덕비 앞에선 특히 ,하둔, 방답,어구의 50대이상 되는 분들은 숙연한 마음과 함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 송덕비의 주인공인 박공이 바로 청마선생의 외조부가 되시니 동랑 유치진 선생과 청마선생의 어머니가 되시는 박우수 여사의 친정이 바로 둔덕 하둔이라는 방증이 되기 때문에 청마선생의 출생지 논란에 대하여는 둔덕사람들은 무의미 한일로 일축해버린다.
길 손이 박공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청마선생의 외조부가 되어서 그런게 아니다.
2000년 어느 봄날에 박공의 송덕비 제막식이 있던 날 당시 면장을 지낸 필자는 축사에서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우리 둔덕사람, 특히, 하둔, 방답 , 어구사람들은 3대에 걸쳐 이 분의 은공을 입고 살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던 그 해로 말하면 우리나라 전역이 거의 같은 수준이었겠지만, 춘궁기란게 있었고, 전기나 자동차 같은 문명의 이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하천은 생긴 그대로 흐르고 어김없이 그 하천 마다 맨발로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아슬아슬하게 물길을 건너서 학교 가고, 장보러 가고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둔덕에서 당대의 부농이었던 박공은 춘궁기에 어려운 사람에게 식량과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내주기도하여 이웃을 돌보며 살았다고 하며 둔덕천과 마을소하천을 가로질러 사비를 들여 3개소의 나무다리를 가설하여 주민들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둔덕천의 그 나무 다리가 노후하여 폭우에 유실되자 또 다시 외지에서 대형 석물 20여개를 운반하여 둔덕천에 징검다리를 설치하였는데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급류에 떠내려 가고 파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 1995년도에 재직한 김화순 둔덕면장이 (현 시청 지역경제과장) 둔덕천하구에 파묻힌 징검다리 잔해 일부를 찾아내어 현재 송덕비 앞에 전시해 두고 있다.
고향에는 추억이 있다
둔덕천하면 참 추억이 많은 곳이다. 우리가 어릴 적 둔덕천은 수심이 깊어 5미터정도의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해도 끝이 닿지 않아 여름철 물놀이 장소가 되었고 봄이면 사백어(일명 뱅아리)가 떼를 지어 올라오고, 은 빛 은어가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여름철이 되면 금빛 은어로 변하면 그야말로 둔덕천은 물반 은어 반이었다. 이 은어를 잡아 된장을 속에 넣고 맛있게 먹어본 사람들은 평생 둔덕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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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마교 위에서 바라본 둔덕천과 면 소재지 |
또한 둔덕천은 수질이 일급수에 해당되어 의종의 수라상에 진상하였다는 파래(일명 감탕)은 초봄 둔덕사람들의 식탁을 장식한 중요한 반찬거리이다.
이 감탕은 깨끗한 민물과 바닷물이 교수되는 하천하구에서만 자라는 생물이다. 둔덕에 오면 이 감탕을 드셔보시라, 그러면 둔덕의 맛을 다보고 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즈음 청마교 너머에는 왕새우 양식장이 생겨 새우를 사서 즉석 구이 해먹으며 소주 한 잔 곁들이는 맛과 멋도 함께 즐겨 봄직한 곳이다.
고향이 둔덕사람이 아닐지라도 청마교를 건너 1500미터의 방조제 뚝길을 걸어 서편방조제에서 낙조를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에 면사무소 앞 해안길가에 핀 해당화를 감상해보라 그리고 청마의 유품과 작품을 감상 할 기회를 가져보라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재지 마을 맞은 편에 방답마을과 어구 마을이 있는데 간척지 방조제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다와 맞닿은 갯촌이었다. 그러기에 임진왜란 이후에 왜구침입에 대비하여 방답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 광진산업자리가 되는 곳이 쇠널이라는 지명을 갖고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구마을을 진입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방답을 통과해야 한다. 그 방답마을과 어구마을 경계에 위치하는 곳이 쇠널이다.
어구의 본명이 외인금이라 아마 임진왜란 이후에 이곳에서 병기를 제작한곳으로써 외인출입금지구역이 되었고 그 외인 출입금지팻말을 쇠널판지에 새겨 세웠으니 쇠널이라는 지명을 낳게한 한 것으로 짐작된다.
드러나는 역사의 현장
다음 날 나그네는 깊은 감회 속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하둔마을을 지나 하둔과 농막마을의 경계지점에 이르면 여관곡과 자주방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바로 의종이 세금을 현물 수납하던 기관이 있었으니 여관이라 하고 여기에 병사가 검문하고 근무하였기로 자주권을 행사한 곳이라 자주방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농막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곳 지명도 현민이 먹을 식량과 군량미를 생산하기 위한 농영 시설을 농막이라 한데서 유래하였으며, 폐왕성 옆의 뒷산에 안치봉이라는 낮으막한 산을 이곳 사람들은 의종의 대비를 안치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실제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의종을 따라 이곳 까지 온 사실이 없었고 의종의 후궁 한사람인 무비가 의종을 따라 온 기록으로 볼 때 일반 주민들이 후궁을 태후로 잘못 알고 이렇게 불렀지 않나 싶다. 또한, 여관곡 앞의 너른 들을 장들이라고 하는데 대비에게 바칠 농사를 짓는 들이라는 뜻으로 장들이라 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것이다.
농막마을 뒤편에는 망골 또는 망터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의종의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는 망대가 있었기로 그 터를 망터 그 골을 망골이라 부르고 있어 의종이 유배 온 임금이 아니라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후사를 도모할 계책을 세운 곳이 바로 둔덕기성(폐왕성)이 아니었을까 ,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림마을을 접어들면 고군현치소의 유허지를 만나게 되는데 의종이 이 곳에 머물기 훨씬 이전인 고려성종2년 서기983년에 거제현을 기성현으로 개칭하여 거제의 치소지인 관아가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비운의 왕 의종과 폐왕성
고군현치소를 지나 거림저수지 옆 산길을 걸어 폐왕성으로 향하면 나그네의 발길은 가시밭길을 걸어오던 의종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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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덕 폐왕성에서 바라본 견내량 |
최근 거제시에서 성곽을 100여 미터 정도 복원하고 일부 시굴조사를 마친 상태에서 밝혀진 역사적 사실은 서기 1170년에 의종이 거제도 둔덕 땅으로 유배 와서 쌓은 성이 아니라 신라 시대에 축조하여 허물어져 있던 성을 의종의 유배에 대비하여 급히 보수하여 사용한 성곽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근래에 와서 폐왕성 양사방으로 임도가 개설 되어 신거제대교와 연결되고 사등오량, 둔덕면 상서 마을과도 연결된다.
폐왕성 아래 돌무더기 (덜겅)가 넓게 퍼져있는데 이 곳 둔덕사람들은 이 덜겅을 대단히 신성시 하고 있다. 이 바위덩어리 밑으로 사시사철 청아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바위는 사람들의 건강을 좋게 하는 효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설 속의 천태산 마고할멈이 의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도술로써 성을 쌓고 남은 돌무더기가 바로 마고덩걸이라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거림마을 다음 마을이 마장이다. 의종때에 우두봉 산 자락 평평한 곳에서 군마를 길럿다는 마장터가 있으니 거림위의 마을이름이 그 대로 마장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폐왕성에서 유래된 지명중에 마하터란 곳이 있다. 임금을 알현하고자 하는 자는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와야 하는 지점으로 마하, 또는 하마터라고 불려지고 있다. 둔덕면사무소에 가면 둔덕지형을 축소모형 ( 미니어쳐) 으로 표시되어 있어 미리보고 답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방하마을과 산방마을로 향하는 나그네의 발길은 한결 가벼워 진다.
둔덕천 중상류 지점을 가로지르는 방산교를 건너면 우람한 팽나무 하나가 길손을 맞이한다. 이 팽나무 아래에서 어린시절 형인 동랑이 어린 동생 청마와 함께 해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으리라. 4백년은 될 법한 이 팽나무 밑뿌리 부분은 승천을 앞둔 용의 발톱같이 힘차 보인다.
동랑.청마선생의 생가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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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덕면사무소 옆 복지회관 2층에 있는 청마 유품전시관 |
생가 아릿 채 작은 방에서 동랑.청마가 태어나 동랑이 5섯살 때 청마가 3살 때 한의사였던 부친 유준수가 가솔을 거느리고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이 곳을 떠나 통영에 살게 된 것이다. 법정문제로 까지 비하된 청마의 출생지 시비를 놓고 보면 어이가 없다.
거제도 둔덕골이라는 청마 자작시의 싯귀처럼, “8대로 내려 내조부의 살으신 곳”은 바로 고향이 된다. 청마가 태어난 시대에 같이 살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출생지를 증명한단 말인가. 오로지 그 유족들의 뜻을 존중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무튼 청마선생의 무덤은 둔덕 방하리 선영에 이장되어 묻혀 있다, 어머님을 먼저 보내면서 어머님 곁에 묻히겠다는 청마가 적은 사모비 마지막 구절은 일찍이 써 놓은 유언과도 같아 양산 백운동 공원묘지에서 이곳으로 이장하게 된 연유를 알 것 같다.
“멀지 않아 제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이 하늘 우러르고 묻힐 날을 기약하오며 죽어 설을 이 목숨이 저윽이나 마음편안 하옵내다. 길이 고이 잠드시옵소서. 아들 청마 유치환 “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청마선생의 묘소를 향해 고불고불 산길을 가야한다. 가는 길목에 방하리에만 존재하는 고려무덤을 보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면적이 훼손되고 축소되었지만 일부의 무덤흔적이 아무도 돌보지 않아 숲속에 버려져 있다.
고려무덤은 왜 생겨났을까? 의종이 둔덕 땅을 밟을 때 의종을 따라온 문무백관과 호위군은 폐왕성 주변의 거림,농막, 마장, 방하 등지에서 살게 되었다. 의종이 둔덕땅에 온지 3년째가 되는 1173년에 의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의종은 이 의민에 의하여 경주(당시 계림)에서 시해되었고, 이제나 저제나 임금따라 개성으로 가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은 모든 꿈이 좌절된채 1196년 명종 26년에 이의민이 삼족참형 될 때까지 27년간을 둔덕 땅에서 살게 되었으니, 바로 그 들의 공동묘지가 지금의 고려무덤인 것이다.
그리고, 청마생가 200여미터 뒷 편에는 공주샘이라는 조그만 샘터가 지금도 존재하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의종의 공주가 물이 좋은 이 곳 샘터에서 물을 자주 길어 갔다고하여 공주샘이 되었다한다. 청마선생의 무덤을 향하는 작은 도로는 매우 한적 하다.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길 손의 발자국 소리 모두가 자연의 소리로 귓가에서 감흥을 일으킨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꼭 가야 할 길이지만 청마선생은 죽어서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참배하고 있으며 합장한 부모님과 그 옆으로 부인과 나란히 고향땅에 묻혀 있으니 말이다.
청마선생 묘소 앞에서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면서 서둘러 산방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청마생가 앞 팽나무를 지나 산방산으로 향했다. 신봉승 조선왕조 5백년 작가가 둔덕을 방문 후 강연장에서 산방산은 필봉이라, 청마선생 같은 당대의 걸출한 문인이 탄생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거제 5대명산 중 하나 산방산
산방산의 높이는 507.2미터로 소백산 줄기를 이어받은 거제 5대 명산중의 하나이다. 멋진 산은 사방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람하고 잘생긴 산이어야 한다 했는데 거제 5대 명산중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산은 산방산 밖에 없다.
산방산은 갖가지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심령스런 산이다.
기우제를 지낸 3일 후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무제터가 있고 무제터 위에는 매를 닮았다 하여 매바위가 있다. 또한 20여평 되는 부처굴이 있는데 일명 삼신굴이라고도 하며 삼존석불이 있었으나 해방 후 등산객의 증가로 석가모니불의 머리부분이 훼손되었고,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의 돌부처는 도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방산 정상부분에서 조금만 아래로 향하면 오색무지터가 나오는데 영롱한 오색의 무지개 색깔이 나오는 신비스런 땅이 있다. 이 곳에 무덤을 만들면 그 집안은 부귀영화가 따르나 둔덕땅 전체는 가뭄이 든다하여 옛날부터 둔덕사람들은 혹심한 가뭄이 들면 이 곳 땅에 묻힌 유골이 있는지 살폈다고 한다.
산방산에는 옥굴이라는 굴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원종 12년 서기 1271년에 왜구의 침범이 극심하여 나라에서 거제현민 전체를 거창의 가조현으로 소개시킨 일이 있는데 고향땅을 떠나기 싫어한 옥씨 일가가 이 동굴에서 1392년 조선 창건 때 까지 숨어 살았다고 하여 옥굴이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산방산에는 박달나무 군락지가 있어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여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이하자 온 백성이 뜻을 모아 몽고군을 불력으로서 몰아내기 위하여 현재 합천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는데 그 경판제작에 사용된 목재가 바로 산방산에서 가져간 박달나무였으니 참으로 심령스런 산이 아닐 수 없다.
정상에서 바라다본 산자락은 그야말로 만산홍엽이다. 옥동마을 쪽으로 타고 흐르는 단풍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산 길에 절골마을 야생화 식물원에 들렀다.
절골마을 야생화 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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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덕 야생화 식물원 |
서울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고향 땅에서 명품을 남기겠다는 일념하나로 고향을 찾아온 유일한 민간투자 사업가이시다. 식물원을 조성한지 8년 만에 거의 마무리 하고 막바지 오픈 준비에 한창이다.
그 주인공 되시는 분이 바로 이 곳 산방마을 에서 출생한 거제중앙신문 김덕훈 회장이다. 식물원 관리자로부터 향긋한 차 한잔을 대접받고 나오는데 어느새 땅거미가 식물원을 덮고 있었다.
식물원 오솔길에 핀 구절초 무리에 넋을 잃고 서서 오늘 하루의 모든 여독이 봄눈녹듯 풀림을 느낀다. 1박 2일간의 둔덕고향 기행을 통하여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이 작은 고을 둔덕 땅에서 일어난 아기자기한 수 많은 역사의 편린을 주어담고, 음미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나그네의 감회를 무엇으로 형언하랴.








